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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 Dec 19. 2021

혐오의 언어로 도배된 세계의 나


모처럼 매서운 추위가 눈보라와 함께 찾아온 날이었다. 맨 뒷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여성 세 명이 나란히 내 옆자리에 앉았다. 평소에는 옆에 누가 앉건 신경도 쓰지 않았고, 고개조차도 돌리지 않지만 그날은 어쩔 수가 없었다. 창밖만 보던 고개를 돌려 그들이 누구인지 돌려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진한 향수 냄새 때문이었다. 큰 수술을 마친 후 달라진 점이 몇 가지가 있지만 그 중 가장 불편한 것은 향수나 헤어스프레이 냄새를 참을 수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들의 향수 냄새는 하나같이 같았는데 정말이지 ‘코를 찌른다’는 표현이 뭔지 정확하게 알 것 같은 수준의 냄새였다. 버스에 타기 바로 직전에 뿌렸나 싶을 정도로 생기발랄한 냄새였다. 굳이 그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아도 그들이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종류이기도 했다. 외국, 특히 동남아시아의 공항에 가면 맡을 수 있는 그런 종류였다.


아닌 게 아니라 중국어가 들려왔다. 팟캐스트를 듣느라 이어폰을 끼고 있는 상태였지만 이어폰 속의 소리가 묻힐 정도였다. 가장 목소리가 큰 여성은 중국인 남성과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대체 왜인지 스피커폰으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팟캐스트를 끄고 소리를 좀더 키워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그제야 버스 안 나만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생각은 이상하게 흘러갔다. ‘오늘 같은 날에 미니스커트에 하이힐까지 신은 걸 보니 놀러가는 모양인데 저런 거 신고 눈길에서 멀쩡하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으려나’부터 시작해서 ‘저러니 ‘너네 나라로 꺼져’ 같은 댓글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거야’까지. 그렇게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다 깜짝 놀랐다. 기사에 중국이나 아시아라는 단어만 나와도 달리는 혐오 댓글의 내용이 그대로 내 속에서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불쾌한 향수 냄새라는 데서 시작한 불편함의 감정이 젊은 외국인 여성에 대한 혐오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지독하도록 진하게 향수를 뿌린 중국인 남성이었다고 해도 내 반응은 같았을 테지만 옷차림에 대해 거슬리는 표현을 쓴 걸 보니 여성에 대한 차별과 외국인에 대한 혐오가 뒤섞인 감정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모순적이게도 혐오 댓글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대부분의 댓글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데 핵심이 있었다. 우리나라 인구는 점점 줄어들 것이고 그러다 보면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와서 일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 될 터였다. 생산성의 측면을 떠나서도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지구촌 각 나라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건 합당한 일이 될 게 분명하다는 게 평소 생각이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곳곳에서 흉악한 범죄만 일으킬 거라는 논리는 상당히 불합리하거나 몰상식한 거라고 생각했던 바였다. 그런데도 내가 버스에서 맞닥뜨린 현실 앞에서 그동안 세워왔던 논리와 합리성은 어이없이 무너졌다.

혐오 댓글을 너무 많이 읽어서였을까. 아니면 내 생각이라는 것이 이토록 허약한 기반위에 세워졌던 것이었음을 방증하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뭐가 중할까 싶었다. 그 순간에 혐오의 언어들을 무의식적으로 뱉어낸 것도 나고, 댓글을 읽으면서 편협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을 비난하던 이 또한 나이니 말이다. 그저 어느 쪽의 나이건, 내가 틀렸음을 인정하는 수밖에.     


너무나 당연하게도 깨닫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생명으로 돌아가기』에서 조애나 메이시, 몰리 영 브라운은 세 가지 세계관에 대해 말했다. 첫 번째 세계관은 통상적 삶이고, 두 번째는 대붕괴, 세 번째는 대전환의 관점이라고 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서 통용되는 ‘통상적 삶’과 다음 단계인 ‘대붕괴’는 환경 활동가들이 보는 세계에서 가질 수 있는 세계관이다. 세 번째는 말 그대로 그러한 관점들을 뛰어넘는 ‘대전환’의 관점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연결 작업’을 해야 하며 이 또한 고마움의 단계, 고통 존중의 단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앞으로 나아가 실천하기의 네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했다.

『생명으로 돌아가기』에서는 지구의 생태계를 유지하거나 혹은 나아지도록 만드는데 그러한 관점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저자들이 단순히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땅으로서의 지구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서로를 배제하고 타인을 혐오하는 세계란 결과적으로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정작 내가 마주한 현실에서는 지극히 기득권의 관점에서만 현상을 파악했던 것이다. 그러니 나는 갈 길이 멀다는 얘기다.


다만 책에서 저자들이 말한 재연결 작업이 혼자서도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우선 감사명상을 하면서 고마움의 단계에라도 진입한다면 좋겠지만 그 과정을 낯설어하고 낯 뜨거워하는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은 좀 없다. 그저 좀 가볍고 유머러스하게 그 과정을 거칠 방법은 없을지 고민이 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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