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니 20대에는 우정을 즐기기에도 바빠 친구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집보다 학교에 있는 시간이 길었고 학교에서는 어느 공간을 가나 친구들이 한무리씩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닐 때에는 일에 치여 친구를 만날 시간이 줄어들었고 동료와 상사 사이에서 내 몫의 역할을 해내는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리고 결혼을 한 이후에는 가끔 친구들을 만나도 아이들과 남편, 그리고 시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남자들도 인생의 시기별로 어떤 변화가 있겠지만 여자들의 우정은 결혼을 기점으로 참 많이 변한다. 일단 결혼을 했냐 아니냐에서 지속될 관계가 갈리고, 결혼 후 출산을 했느냐 아니냐로 관심사가 확연히 갈리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는 순간 그 이전까지의 내 삶은 일시정지가 되고 '엄마'의 삶이 시작되면서 세상을 보는 모든 시선이 새로 리셋된다. 우정, 시간, 돈, 사랑, 인생, 인간관계 등등 모든 것에 대한 정의가 다 새롭게 내려지는 것이다. 그 낯설고 외로운 경험은 아주 긴 터널을 지나가는 것처럼 이어지다가 양육자로서 역할이 느슨해지는 50세 즈음에 이르러서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최근 내 머릿속은 '우정'에 관한 여러 생각들로 분주했다. 나이 든 후의 우정이 지속되는 것이 왜 어려운지, 어떤 이유로 친구들과 멀어지고 가까워지는지, 내가 원하는 우정을 나도 누군가에게 주고 있기는 한 건지 말이다.
사실 이 나이쯤 되니친구와 사이 좀 틀어졌다고 해서 학창 시절처럼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아니다. 하지만친구라는 카테고리로 남아있는 가까운 누군가에게 기대했던 위로와 이해를 받지 못하니, 인생을 잘못 살았나라고 묻게 된다.
금이 간 항아리는 버리면 그만이지 왜 그리 손에 쥐고 안절부절못하는 건지, 여러 날 밤을 우정에 실망해 혼자 묻고 답하고 또다시 물어보았다.
마흔 중반 되었을 때다. 그 친구를 '냉냉이'라고 해두자. 냉냉이는 내가 가게를 오픈했을 때 두 시간쯤 걸리는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진한 더치커피 세트를 들고 와 축하해 주었고 나는 그런 친구가 무척 고마웠다. 냉냉이와 나는 20년쯤 된 사이였는데 사심 없고 담백한 성격의 냉냉이를 너무 편하게 생각한 나머지 고민을 얘기한다는 것이 친구의 상황을 헤아리지 않고 내 욕심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냈던 것 같다. 아차 하고 다시 연락을 했을 때 냉냉이는 기분이 상한 단계를 지나있는 듯했다. 사무적인 태도로 짧게 통화를 끝내더니 급기야는 전화를 받지 않을 때도 있었다. 자존심이 무척 상했지만 사실상 냉냉이와 친구의 인연이 끝났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런데 그 상처가 겨우 가라앉을 무렵, 또 다른 친구의 무신경한 말에 마음을 상하는 일이 있었다. 이 친구는 '싹싹이'라고 해두자. 이 친구 역시 30년이 넘은 인연이었고 한 아파트 단지에서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며 세월을 보냈었기에 나는 우리가 서로에게 절친이라고 믿고 있었다. 물론 싹싹이도 나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친구는 내가 털어놓은 고민을 듣고서 너무나 가벼운 말투로 내 처신을 비아냥댔다. 당황한 나는 그 자리에서 싹싹이의 말을 제지하지 못했고 전화를 끊고 나서야 그의 무신경한 응대에분노했다. 그 경박한 목소리를 떠올릴 때마다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무례에 대응하는 나의 우유부단한 태도와 사람 보는 안목 없음에 실망했다. 나이 50이 넘어서도 사는 데 이렇게 서툰 내가 싫었다.
그러다 시간이 좀 지나면서 인간관계에서 비슷한 패턴으로 뒤통수 맞는 게 혹시 나의 문제는 아닐까 돌아보게 되었다.
며칠 고민한 끝에 얻은 결론은, 내가 누군가와 관계를 만들어나갈 때 상대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늘 내가보고 싶은 대로 본다는 것이 문제였다.
'싹싹이'와 본격적으로 친해질 무렵, 나는 5살 2살 난 아이들을 데리고 산동네 넓은 빌라에서 대단지 비좁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던 상태라 갑자기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교육정보를 나누며 이합집산하는 젊은 엄마들의 기세에 눌렸고 여기가 내가 아이를 키울만한 곳인가에 대한 확신도 들지 않았다. 그때 마침 아이를 데리고 산책하다 우연히 20대에 알고 지내던 '싹싹이'를 다시 만났었는데, 그래도 그가 한때 글 쓰는 직업을 가졌었고 한 직장에서 서로 일하던 모습을 보았던지라 낯선 환경에서 믿을만한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었다. 실제로 '싹싹이'는 적당하게 친절했고 그와의 관계는 10여 년 동안 아이들을 키우면서 상당히 의지가 되었다. 하지만 최근 통화 이후 다시 지난날을 돌아보니 '싹싹이'는 내가 정말 힘들 때 먼저 다가와 위로해준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항상 험한 일을 치르고 겨우 힘을 회복한 내가 다시 연락을 하면 들어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내게 정말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역시 함께 기뻐해 주었다기보다 그냥저냥 박자에 맞추어 손뼉 한번 쳐주는 정도였었다.
우리는 누군가와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고, 멘토가 된다. 혹은 경쟁자가 되고, 협력자가 되며 감시자가 되기도 한다. 어떤 관계이든 인연을 맺는 그 순간부터 상대에게 나만 볼 수 있는 가면 하나를 씌운다. 그 가면이 벗겨지지 않은 상태가 지속된다면 처음에 기대했던 관계가 계속 이어지겠지만 뜻밖의 순간 바람이 불어와 그에게 씌워놓은 가면이 벗겨지거나 찢어진다면 우리는 그를 알아볼 수가 없다. 내 앞에 서 있는 그는 더 이상 내가 알고 있던 익숙한 얼굴의 그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그 당황스러운 경험을 '배신' 혹은 '반전'이라고 부른다.
내가 씌워 둔 가면대로 상대를 보고 싶은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위로가 필요한 시기를 지나기 마련이고 그때마다 적절하고 진실한 위안을 주는 사람을 곁에 두는 행운을 누리는 일은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냉냉이'는 나에게 어떤 가면을 씌워두었던 걸까. 내가 '싹싹이'에게 가면을 씌워 두고 듣고 싶었던 위로의 말은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젊은 시절에 비해 훅 줄어든 인간관계를 보상받고 싶은 마음에 '싹싹이'가 내게 열어보였던 마음을 부풀려 '절친'이라 이름 붙였고 그가 내게 준 마음 이상의 것을 그에게 내주면서 좁지만 깊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다고 스스로 위안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싹싹이에게 씌어둔 가면이 행여 벗겨지지 않을까 안간힘을 다해 잡아두면서 말이다.
며칠 전 경칩을 지나면서 인터넷으로 화분을 몇 개 주문했다. 사나흘쯤 지나 도착한 박스를 열어보니 잎사귀에 흰 무늬가 어우러진 초록잎 식물들과 키 작은 떡갈 고무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들해진 포인세티아와 올리브나무를 뿌리째 털어내고 비어있던 화분에 새로 도착한 식물들을 옮겨 심었다. 그리고 햇살이 잘 드는 거실 창 앞에 세워두니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지쳐 보이던 잎사귀들이 조금씩 살아났다.
날마다 싱싱해지는 식물들을 보며 무례한 우정을 견디느라 애쓴 내 마음도 같이 들여다본다. 나이가 들면서 넓어지기는커녕 점점 좁아지는 것 같은 마음을 감추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냥 그것대로 조금씩 깊어가기를 바라본다.
60이 되고 70이 되면, 누군가를 만날 때 내 손에 쥐고 있던 가면을 씌우지 않고 그 사람의 맨 얼굴 그대로 사랑하고 살아갈 날이 오기는 할까, 그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