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에 불과하다 생각했다. 생생한 꿈을 꾸고 일어난 아침, 절친의 안위가 걱정돼 전화를 해야겠다 맘먹고 망설이다 하루를 날려버리는 일의 반복.
그냥 네 관심도가 그 정도인 거 아냐? 걔가 어떤 상태인지보다 네 자잘한 일상이 더 중요한 거겠지.
내 안의 비판자는 이런 식이다. 가장 아파하는 부분을 뾰족하게 짚어낸다. 당연하지 않겠나. 비판하는 자도 나인걸. 본래 팬이 안티가 됐을 때 가장 무서운 법이다.
어쨌든 평생 내 의견이나 욕구를 최상단에 두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래도 절친인데. 친구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제정신으로 못 살 걸 알면서 습관의 굴레에서 쉽사리 벗어나질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이 나다.
내가 진심으로 애착을 느끼는 대상은 그리 많지 않다. 다행인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을 명확히 인식하고,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몇 안 되는 사람이니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이런 모든 상황을 잘 알면서도 쉽사리 행동(전화 걸기)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소극적이어서가 아니다. 일단 ‘행동’의 사인이 뜨면 몸이 먼저 반응하는 인간이니. 그러거나 말거나 이유는 명백하다. 나는 두려운 거다. 꿈을 꾸고 난 후의 걱정이 친구의 목소리를 통해 현실이 되는 순간, 감당하지 못할 슬픔과 막막함이 덮쳐올 것을 알기에.
친구가 처한 상황은 평범한 인간인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가족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눈 송사가 걸려 있고, 죽음을 선고 받은 가족이 있고, 말로는 다 하지 못하는 아픔이 켜켜이 쌓여 있다. 물론 안다. 친구도 나도, 우리가 서로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상황 개선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조금 더 적극성을 발휘해 만나는 건 서로에게 미안함만 더할 뿐이고.
함께 해온 세월만큼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일들은 늘어난다. 그렇기에 쉽사리 할 수 없는 일도 많아졌다. 지나친 배려가 오히려 관계에 독이 된 세월이다. 어차피 내가 신이 아닌 이상 친구의 일을 해결해 줄 도리는 없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의 하루를 걱정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한 명은 있다’는 인식을 주는 것뿐. 때로는 그마저 하찮아지는 순간이 있겠지만 정말 막다른 길에 도달했다 느낄 때 한 명쯤 떠올릴 수 있는 얼굴이 있어야 한다는 건, 내 지론이다.
쓸모없는 말이 길었다. 전화나 할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