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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깅여름 Aug 21. 2023

신(新)기록

매일 새로운 일 #3. 여름 바다

2023년 8월 4일

오늘의 신(新)기록 : 여름 바다


나의 고향은 포항이다.

"제 고향은 포항입니다."라고 말하면 으레 돌아오는 반응들이 있다.

"집에서 바다가 보여?", "과메기!", "아버지 포항제철 다니셔?" "웃을 때 포..항항항 웃어?"

과메기를 먹을 수 있으나 좋아하지는 않고, 아버지는 교사셨고, 포항항 웃지도 않는다.

그리고 집에서 바다까지 걸어갈 수는 있지만 오션뷰는 아니다. 그럼에도 매년 여름 동네 바닷가에서 열리는 야시장 구경과 산책, 비 오는 날 파도구경 등이 일상이었으니 나름 바다와 매우 가까이 나고 자랐다.


근데 이런 나는 의외로 여름 바다에 가서 해수욕을 즐긴 기억이 거의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의 영향이 매우 큰데, 엄마는 대천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해수욕=땡볕과 모래사장=뜨겁고 번거롭다'라는 생각을 갖고 계셔서 우리 식구들은 늘 바다가 아닌 계곡으로 가 더위를 식히고는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긴 게 걸어갈 수 있는 바다를 두고 차로 한 시간을 가야 하는 계곡을 무려 평일에 다녔다.

(그 시절 엄마아빠의 체력이 부럽고 부지런함에 감사드립니다... 그렇지만 왜 바다에 가지 않았죠?)


그래서 남자친구가 강릉에 가자고 했을 때에도 두 가지 생각이 바로 머리를 스쳤다.

첫째, 바다를?

둘째, 8월 4일에?


첫째, 바다를?

어릴 적부터 엄마가 주입한 공식대로 나해수욕은 뜨겁고 번거로운 것이라 생각해 여행이 썩 내키지 않았고 가면 고생만 할 것이라 부정적인 감정이 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상상 - 아주 더운 땡볕, 사람 반 물 반 바다에서 수영을 하기 위해 파라솔을 빌리는 나, 심지어 엄청난 바가지요금!! 가는 길 엄청난 도로정체 그리고 교통사고!!(왜 생각이 여기까지 가는 건데)- 을 하며 바다는 절대로 가지 않기로 거의 결심했다.


둘째, 8월 4일에?

8월 4일(금)이 무슨 날이냐면 8월 7일(월)에 있을 수술 3일 전이다. 그게 뭐냐고? 그게 뭐냐면 바다에 놀러 갔다가 내가 사고를 당하거나 다쳐서, 혹은 수술에 영향을 주는 어떤 행동을 해서 수술을 못하거나 잘못될 수 있다는 위험을 감당하고 강릉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 생각하겠지만 나는 매우 걱정이 많은 사람으로서 이런 위험을 감당하려면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 외에도 피부가 아주 많이 탈 텐데(선크림, 모자, 선글라스 있음, 파라솔 대여 가능), 수영복을 새로 사고 싶은데(사면됨), 수영을 하지 못하는데(사실 자유형, 배영 할 수 있음, 튜브 대여 가능), 남자친구랑 여행 갔다 싸우면 어떡해(싸울 일이면 싸우고 아니면 안 싸우면 된다) 등 말도 안 되는 이유가 줄줄이 머리에 떠올랐다.


대체 왜 가지 않을 이유만 찾는 걸까? 
글을 쓰면서 보니 가장 큰 원인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고정관념,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 불안이었다.

나는 불안이 큰 사람으로 태어났다. 예전 기질 검사를 해보니 태생적으로 불안이 크고, 변화에 대한 거부감이 100이었다. 100!! 그래서 새로운 것, 하지 않았던 것을 할 때 불안이나 심리적 압박이 나를 압도할 때가 있다. 물론 기질이 전부가 아니고, 살던 대로 살고 싶지는 않았기에 많은 변화와 도전을 꾸준히 하며 살아왔지만 남들이 보기에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나는 100번 고민하고 최악을 상상해 보고 감당할 수 있는지, 후회할지 자문하고 했을 때의 장점과 단점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선택하고 행동하다 보니 내가 느끼기에 보통 사람들보다는 에너지가 아주 많이 쓰인다.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로 하지 않았던 일, 그리고 내 고정관념을 깨야하는 일이었고 심지어 중요한 이벤트를 앞둔 불안이 올라와있는 상태에서 계획도 없이 당장 간다는 것은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렇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점점 커지는 목소리도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여름, 이 여름이 가기 전에 바다에 가보고 싶다! 실제로 가보고 좋은지 안 좋은지 확인하고 싶다! 그리고 난 새로운 것을 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하지 않았던가!


결국 나는 8월 4일(금), 수술 3일 전 강릉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차가 막힐 것 같아 기차를 타려고 했더니 표가 없었지만 낚시를 하다 보니 좌석을 구할 수 있었다. 숙소는 남자친구가 급하게 에어비앤비를 알아보았고 깨끗해 보이는 곳을  예약했다. 그 외 계획은 없었다. 가는 길에 막국수 맛집을 찾아 점심을 먹고 숙소 앞 해변에 도착해 파라솔과 튜브를 빌려 모래사장에 자리를 잡았다.


어땠냐고? 나는 더 일찍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깨끗하고 투명한 바다, 쨍한 하늘, 뜨거운 햇볕, 여름 노래. 잔잔한 파도에 몸을 맡기고 둥둥 떠있는 기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이 충만했다. 그날 우리는 바다와 모래사장을 오가며 해가 질 때까지 마음껏 여름을 누렸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날 모래사장에 누워 바라본 하늘과 파도가 선명하다.


나름 이 나이까지 살며 얻은 인생의 지혜가 있는데 좋아하는 것들을 발굴하고 그것들을 일상의 여기저기에 심어두는 것이 삶을 유지하는 큰 힘이라는 것이다. 사실 최근 내가 좋아하던 것들-산책, 영화, 카페-에 대한 애정이나 행복의 강도가 약해져서 활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해보자, 생각만 할 것 같으니 브런치에 글까지 써가며 번복할 수 없도록 나를 끌고 가자! 다짐했는데 참 잘한 결정이다. 좋아하는 것 리스트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 여름 바다!

앞으로 매해 여름이 오면 난 부산을 떨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바다를 찾고, 파도에 몸을 맡길 테다.

 

2023년 8월 4일

오늘의 신(新)기록 : 여름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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