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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백 Feb 04. 2021

2-6) 오빠의 메뚜기

 오빠가 말했다. 


“네가 가고, 할아버지한테 계속 메뚜기를 구워 달랬었어.” 


 오랜만에 집에 놀러 온 외사촌오빠와 새언니가 함께 하는 식사 자리였다. 우리는 강아지 세 마리를 집에 두고, 집 앞 식당에서 갈비를 먹었다. 한창 고기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질 때쯤 우리의 추억팔이 대화도 무르익었다. 


 “우리 어릴 때 그 오락기 얼마였지? 한판에 백 원이었나. 우리 그거 실컷 하고 쫀드기 사 먹겠다고 급식비 잃어버렸다고 할머니한테 거짓말했잖아.” 


 “그랬었지. 할머니 등골 빠지는 줄 모르고.”


 “그리고 오빠랑 나랑 메뚜기도 구워 먹고, 언니도 메뚜기 구워 먹어봤어요? 우리 집 앞에 논이 크게 있었는데 거기서 메뚜기 잡아서 많이 구워 먹었었는데...” 


 “네가 무슨 메뚜기를 먹어봤어? 그건 나 혼자 있을 땐데.”


 “무슨 소리야 오빠가 맨날 잡아줬잖아. 논에서 바로 구워 먹고.” 


 정확히 25년 전에 나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외사촌오빠(이하 오빠)를 버려두고 엄마 따라 바다를 건넜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도 보기 드문 허물어져 가는 집 어귀로부터, 몇 시간의 차와 기차를 번갈아 타고 배로 갈아타면서 나는 총총히 설렌 마음으로 엄마를 따라 제주도로 가버렸다. 


 떠나기 전에 지냈던 할머니, 할아버지, 오빠와 나의 집에 대한 기억은 주로 낡았고 허름하고 부옇다. 이미 보일러와 현대식 변기들이 대부분인 시대였는데도 어째선지 그 집엔 아궁이가 있었고 우린 매번 꼬박 아궁이에 밥을 해 먹었다. 덕분에 매일 밤 할머니가 끓여준 구수한 누룽지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볼일 보며 발아래를 보면 똥구더기가 득실거리는 푸세식 화장실도 있었다. 추운 겨울밤에는 요강에 볼일을 봤고, 다른 계절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흙벽 화장실 앞에 오빠를 세워 놨다. 내가 떠나올 적까지 우리는 연탄을 갈아 끼우며 아랫목에 불을 때었다. 두 살 터울의 오빠는 어린이집이며 유치원도 가보지 못한 동생이 학교 갈 나이가 되자 걸핏하면 체인이 빠지는 고물 자전거에 싣고 30분을 달려 학교로 데려가고 집으로 데려왔었다. 동네 언니들과 고무줄놀이하는 내 옆을 지켜주기도 했고, 엄마 없는 애라고 놀림받던 나를 친구로부터 지켜 주기도 했다. 오빠는 내가 떠난 후 홀로 등하교를 했을 것이다. 내가 사춘기를 겪는 동안 그네도 당연히 사춘기를 겪었을 것이고, 외할아버지가 먼저 가시고 외할머니 홀로 남아 공장 일을 그만두었을 때쯤 딱 그만큼 나이 든 주공아파트로 이사 갔을 것이다. 모든 것이 추측인 것은 끝내 내가 떠난 뒤의 일을 소상히 묻지 않은 까닭에 있다. 물어봐야 아픔인 것을 오빠도 나도 이미 알았다. 과자를 달라고 악을 써도 끝내 오빠가 하교하기 전까지 한 톨의 부스러기도 꺼내 주지 않던 할머니는 이미 아셨던 걸까. 오빠는 홀로 남아 끝내 할머니 임종까지 그 곁을 지킬 것이란 것을. 오빠의 부모는 둘 중 한 명도 끝내 오지 않고 오빠를 할머니 곁에 남겨두었다. 


 어렵게 자란 오빠는 검소한 생활이 아직도 몸에 배어 있다. 한 겨울 등골이 서늘하고 손 발이 시려운데도 옷을 두껍게 입으며 보일러를 아끼고, 고민에 고민을 몇 번이고 반복하다 한번 산 옷은 깔끔하게 입고 잘 관리하면서 오래도록 입는다. 가끔 나의 무분별한 소비에 구시렁거리다가도 오빠 집에 놀러 갈 적에는 다 큰 동생 길도 다 알건만 꼬박꼬박 모시러 오고 모셔다 주며 소고기를 부위별로 한 가득 사다 놓고 아낌없이 퍼주는 아빠 행세를 하곤 한다. 


 오빠는 작년 아버지를 여의었다. 장례식장에서도, 그 이후로도 난 오빠의 눈물을 본 적 없다. 다만, 그 아버지의 안식구 되는 사람에게서 얼마 되지 않는 재산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허했던 오빠의 눈동자만 뇌리에 생생할 뿐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아버지를 여의고 오롯이 혼자된 오빠는 그 뒤로 더 자주 내게 전화를 걸어온다.

 

 “뭐해?” 


 “일해. 왜?”


 “그냥.”


 별 말 없는 오빠의 전화에서 헛헛함이 전해오면, 나도 모르게 찡한 죄책감이 가슴을 타고 목 너울을 넘겨 울컥 맺히고 만다. 내가 대장암과 천공으로 병원에 급히 실려갔을 때에도, 가장 먼저 내게 달려온 것이 오빠였다. 죽상을 하고서 담배를 벅벅 피우는 오빠의 모습을 동료들이 상세히도 전해줬었다. 금방이라도 울음보를 터뜨릴 것 같았다고. 


 “오빠, 나 제주도 가고 싶어.”


 “여기 내려와 살아. 제주도 말고.” 


 “거기 가서 뭐 해먹고 살아.”


 “뭐든 하면 되지 뭐.”


 “잠깐만 제주도 갔다 올게 그럼.”


 “가기 전에 잠깐 들러서 자고 가.” 


 오빠가 아직 그 집에 살았다면 지금도 메뚜기를 잡았을까. 나 없이 잡았다던 메뚜기는 얼마나 많았을까. 오빠가 나 없이 구워 먹었다던 메뚜기의 양만큼 딱 그만큼만 외로웠을까. 그런데 그 외로움은 왜 아직도 오빠 주위를 서성이는 것일까. 

 그 시절, 그 어린아이가 부모 없이, 함께 뛰놀던 동병상련의 동생도 잃고, 할머니와 몸 성치 않은 할아버지 밑에서 얼마나 망연했을까… 내가 살아온 섬 마을 이야기도 순탄하지만은 않다는 핑계로 그 적적함과 설움을 지금껏 알고 싶어 하지 않았는데, 설령 알았더라도 있는 힘껏 외면해왔는데, 그때 오빠의 시간들이 메뚜기와 함께 갑자기 날아들었다.  


 끝없이 펼쳐진 논과 논 사이를 매일 해가 다 질 때까지 뛰고 또 뛰었을까. 친구와 함께였으면 좋으련만 역시나 혼자였을까. 밥 먹으라 부르는 이 없이 해가 다 저물 때까지 메뚜기가 풀쩍 뛰어오르길 기다렸을까. 죽음까지 이기적이었던 아버지를 기다렸을까, 아니면 혹시 나를 기다렸을까. 이 생에 오빠의 그 메뚜기를 다 세어보고 갈 수 있을까.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그리다 결국 내가 망연해진다. 


 오빠 곁에 나라도 살아있어야겠다. 이 말이 마음에 응어리진다.



 

출처: pixabay, Kibeom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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