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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ya May 13. 2024

13. 간병 vs. 국제이사 (feat.코로나&만삭)

남편을 살리려 밀라노로 갑니다. - (2)

뒤뚱뒤뚱. 불룩 솟은 배를 하고, 마스크와 수술용 장갑, 소독제로 무장을 하고서 양손 가득 남편 먹거리를 챙겨 병원으로 매일 출근(?)을 했다.


코로나가 들끓던 시절, 재활병동은 하루 2번 점심, 저녁 각각 1시간씩만 면회가 가능했다. 공식적으로 그리고 꽤나 엄격하게. 그런데 하루 종일 남편곁을 지키고 있어도 나가라고 하거나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의료진들도 다른 환자들도. 오히려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나와 시어머니를 본인들의 업무 파트너처럼 대해주었다.


그동안 중환자실 3주간 쌓은 간병 경력으로 어머님과 나는 2인 1조가 되어 완벽한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어머님은 외부자극을 통해 남편의 뇌를 깨우는 일을 맡으셨다.

아들의 움직이지 않는 팔과 손가락, 다리를 연신 매만지며 기도하셨다. 마비되어 차가워진 오른쪽 발엔 핫팩을 붙여놓고 주무르고, 밀고 당기며 잠시도 쉬지 않으셨다. 집에서 젓가락을 챙겨 와 소독하고 발바닥과 손바닥 혈자리를 인터넷에서 찾아 연신 자극해 주셨다. 집에 있던 두피 지압기, 괄사 마사지기로 머리와 굳어있는 얼굴근육을 풀어주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엄마의 사랑을 온전히 쏟아부으셨다.   


나는 남편의 감성을 자극하여 그의 심장뇌가 다시 우리를 기억하고 뇌세포가 소생되기를 바랐다.

이어폰을 연결해 남편이 부르던 오페라 아리아부터 찬양, 우리가 좋아했던 가요까지 여러 음악을 들려주었고, 성경책과 희망이 담긴 책을 읽어주었다. 긍정의 메시지를 속삭이고, 그동안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오글거리는 - 사랑표현을 아낌없이 했다. 사랑의 말들을 전하고 싶어도 못할 뻔했으니까...


또한 남편의 위생 담당은 내 몫이었다. 환자에게 위생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3주 이상 샤워를 하지 못하고 있는 남편을 정성껏 닦이고 또 닦였다. 100kg이 넘는 마비된 남편을 씻기는 일을 어디에 비유해야 그 힘듦을 조금이라도 표현할 수 있는지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어쩌면 남편보다 나를 위해 더 정성껏 남편을 씻겼는지 모르겠다. 난 냄새에 매우 민감하고 위생에 철저한 성격이다. 남편의 떡진 머리, 기름진 얼굴, 덥수룩한 수염... 우습지만 남편의 장애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환자들을 위한 위생관리 용품들을 검색하고 필요한 물품을 찾게 된 날이면 다음날 남편을 씻길 생각에 설레었던 순간도 있었다. 에스테틱에 온 것 같이 상황극을 펼치며 정성을 다해 남편을 관리해 주었다. 침대에 누워 있지만 남편의 얼굴은 늘 반짝이고 촉촉했다. 굳어있는 혀가 풀려 어서 말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혓바닥을 특히 열심히 닦아주고, 입으로 밥을 먹지 않아도 양치질에 심혈을 기울였다.  


두 여전사의 간병 도구들.


사실 간병인 제도가 없는 이탈리아 병원에서 간호조무사 선생님들께서 진짜 어렵고 필요한 일은 다 해주셨다. 남편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일, 휠체어에 태워 치료실로 데려가는 일. 그래서 다른 간병에 더 에너지를 쏟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봐도 가장 힘든 순간 밀라노 병원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하루 종일 남편 곁에서 간병을 하고, 저녁식사를 돕고, 잘 준비를 시켜 놓는다. 마지막으로 기도를 해주고 남편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핸드폰을 놓아둔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어렵게 돌리고, 밤새 남편을 지킬 의료진들에게 미미하게나마 도시락김 몇 개와 마스크팩을 뇌물로 건넸다.


'하나님, 오늘 밤도 주님의 천사가 남편곁을 지켜주세요.'   



10월이 되니 7시가 넘으면 밖은 이미 캄캄했다.

녹초가 된 몸과 지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그때부터 국제이사를 준비해야 했다.  

우리의 눈부시게 행복했던 지난 4년간의 추억. 신혼생활 예쁜 추억이 오롯이 담긴 소박한 살림살이들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그곳의 모든 순간을 사랑했던, 그 정든 곳을 갑자기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했다. 


남편이 했던 공연 포스터와 티켓, 남편의 악보들, 모든 물건들에 우리의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 추억을 전부 챙겨서 가져갈 형편이 아니었다. 박스에는 꼭 필요한 물건과 추억, 눈물만 담았다. 멀쩡한 살림살이들은 지인을 통해 무료로 나누며 우리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이 새로운 곳에서는 축복을 전해주기를 기도했다. 남편의 피아노와 태리가 사용했던 그리고 곧 태어날 '태양이'가 사용해야 할 아기 침대를 보내는 날 주체할 수 없이 마음이 괴로웠다.


행정적으로 처리해야 할 것도 많았다. 몸도 마음도 힘들었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됐다. 서류 하나하나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일. 또 한국행 항공권을 알아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코로나가 극심하던 시기라 항공사들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K대표의 도움으로 말펜사 공항 항공사 오피스까지 가서 티켓을 알아보고 예약했다. 한 사람은 장애인으로 또 한 사람은 임신부로 준비해야 할 서류만 한 뭉치였다.  


하루빨리 한국으로 가야 했다. 37주가 넘으면 임신부는 비행기 탑승이 불가했기에. 만약 남편이 한 달 안에 비행기를 탈 수 없다면 나는 뱃속에 아이를 밀라노에서 낳아야 했다. 어머님은 3개월 이상 체류할 수 없었고, 친정부모님은 한국에서 태리(첫째 아이)를 봐주셔야 했다. 어떤 아이가 나올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신생아와 아픈 남편을 나 혼자 돌볼 순 없었다.


남편의 주치의 선생님 방 앞에서 기도했다. 제발 한국으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렸다. 그리고 '태양이'(태명)가 제발 무사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밀라노병원 재활병동 남편의 주치의 선생님 방 앞에서





<믿음이 필요해> - 히즈윌 5집 


이 무렵 히즈윌 찬양으로 많은 힘을 얻었습니다. 

'정든 곳을 등지고 부르심 따라갈 때' 이 구절은 언제나 눈물 없이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믿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믿음을 갖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저를 위로해 준 히즈윌에 감사를 꼭 전하고 싶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yYW9KKb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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