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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승연 Jul 13. 2022

파리 유학을 통해 얻은 것과 잃은 것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했던 2년

대학원 입학 등수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나는 필시 문을 닫고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1학년 내내 하위권에 머물렀다. 워낙 짧게 공부하고 합격해서 ‘내가 혹시 언어 천재가 아닌가’ 잠시나마 착각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짧게 공부하고 합격했다는 것은 결국 절대적인 공부량이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대학원에 입학한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열심히 공부했으므로, 각자의 공부량 격차는 도무지 줄어들 줄을 몰랐다. 입학 성적이 그대로 학업 성적으로 이어졌다. 물론 대학원 2년 동안 독하게 공부해서 졸업 즈음에는 장족의 발전을 한 경우도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언어라는 분야의 특성상 오늘 공부한 것이 당장 내일 결과로 나타나지는 않았고, 그걸 감내하고 공부에 정진하기에는 나는 끈기도 부족하고 성격도 너무 물렁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좌절감도 함께 커지는 기분이었다. 이럴 거면 도대체 나를 왜 뽑은 걸까, 차라리 떨어뜨려서 1년 더 공부하고 오게 하지,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통번역대학원의 수업은 상호 크리틱이 기본이다. 번역 시간에는 번역에 대해 선생님과 동기들로부터 크리틱을 받고, 통역 시간에는 통역에 대해 선생님과 동기들로부터 크리틱을 받는다. 사실상 칭찬은 거의 없고 얼마나 지적을 받느냐가 관건인데, 기초부터 턱없이 부족했던 나는 당연히 매시간 엄청난 지적을 받았다. 꾸역꾸역 수업을 듣고 스터디를 하고 시험을 보는 날들이 이어졌다. 평생 동안 모범생의 범주 안에서 살아온 나로서는 매일매일이 고난의 연속이었다.


나는 무작정 도망가고 싶은 마음에 어떻게 하면 대학원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긴 망설임과 고민 끝에 휴학을 하고 유학을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학교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학교를 제대로 다니고 싶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떠올리며, 나는 아는게 적으니 학교에서 얻어가는 것도 적은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저 졸업장 한 장이 필요한 게 아니라 제대로 공부를 하고 싶어서 온 건데, 제대로 공부도 해보지 않고 그만두기에는 그동안의 시간과 노력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나는 파리로 떠났다. 프랑스에서 어학연수를 해본 적이 없어서 그것만 하고 나면 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돈이 문제였다. 부모님은 간신히 생활비 정도만 부쳐주었기 때문에 먹고 사는 일 외의 것들을 하려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나는 다행이 불어를 할 줄 알아서 마음만 먹으면 일할 기회는 널려 있었다. 한국인 대상 면세점 도우미, 박람회 통역, 회화책 번역 등을 했고, 한국 식당에서는 꽤 오랫동안 서빙 일을 했다. 당시 나는 요리를 전혀 할 줄 모르고 요리에 관심도 없어서 특별한 날이 아니면 집에서 거의 밥을 먹지 않았다. 그래서 저녁에 식당 일을 하러 가서 먹는 밥 한끼가 너무나 소중했다. 서빙 일도 적성에 잘 맞는 편이라 늘 즐거운 마음으로 일터로 향했던 기억이 난다. 프랑스에 있는 동안 내가 어찌나 일을 많이 했는지, ‘OO이는 프랑스에 일하러 왔지’라고 친한 언니가 놀리듯이 이야기할 정도였다. 


인생사가 늘 그렇듯이, 내가 프랑스에 가서 해결하고 오리라 다짐했던 문제들은 상당부분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았다. 그렇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한 2년을 보낸 것만은 분명했다. 제때 집세를 내지 못해 집주인에게 독촉 전화를 받은 적도 있고, 전기세를 낼 줄 몰라 전기와 전화가 끊긴 적도 있었고, 심한 마음 고생을 하면서 살이 갑자기 빠지기도 했고,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나고 나쁜 사람도 많이 만났고, 한국에 있었으면 하지 않았을 여러 아르바이트 일도 했다. 한 마디로, 한국에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깊이와 넓이를 가진 희로애락을 나는 허덕이며 겪어냈다. 제대로 불어 공부를 해보겠다는 나의 초기 계획은 약간 틀어졌지만, 공부 아닌 다른 의미에서 치열했던 그 시간을 통해서도 나는 족히 한 뼘 이상은 성장했다. 


사실 지금에 와서야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를 하지만, 귀국 후 한동안 나는 프랑스만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얻은 것은 분명히 있었지만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냈던 나머지, 다시는 내가 프랑스에 놀러 라도 가나 봐라 이를 갈았다. 하지만 시간은 기억을 미화시키게 마련. 10년쯤 지나자 나는 조금씩 파리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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