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가 아니어도 괜찮아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나는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다. 성적도 딱 중간 정도라 어떤 과목은 조금 잘했고 어떤 과목은 조금 못했다. 교수님의 눈에 들기 위한 이른바 정치 활동을 할 깜냥도 되지 못했다. 게다가 나는 흔하기 흔한 불문과 출신이었다. 통번역대학원에는 학부 시절에 언어 외에 다른 전공을 했거나 대학원 입학 전에 색다른 경력을 쌓은 사람들을 굉장히 높게 쳐주는 분위기가 있다. 당시 내가 알던 우리 과 선후배의 예를 들면, 학부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랑스 요리 학교로 유학을 다녀온 경우가 있었고, 경제학과, 철학과, 사진학과 출신도 있었다. 통번역대학원은 입학을 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육 과정을 충실히 이수하고 졸업해서 통번역사로 활동하는 것이 최종 목표인 학교이므로, 언어 외에 또 다른 전문 분야가 있다는 사실은 졸업 후에 통번역 일을 할 때 훌륭한 경력이 된다.
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계속 아르바이트를 했다. 부모님이 학비까지는 대주셨지만 용돈은 내 힘으로 벌어서 써야 했다. 다행히 나는 학교를 다니며 일을 하는 것이 전혀 싫지 않았고 그리 고생스럽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아주 소박한 소망을 가지고 대학원에 입학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불어를 하면서 밥벌이를 할 수 있다면 돈을 얼마를 받든 무슨 일을 하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입학 직후에 나는 동기들 대부분이 ‘최고의 통번역사’가 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고서 대학원에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모두가 실력이 똑같이 출중한 것은 아닐 텐데 하나같이 그런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자기 객관화’가 지나치게 잘 되는 편이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바란 적이 없다. 나처럼 정복 가능한 적당한 목표를 설정하고 쉽게 성취하기를 즐기는 사람이 흔치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학교에서는 그리 눈에 띄지 못했지만 졸업 후에 본격적으로 일을 하면서부터는 꽤 인정을 받았다. 사실은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내게는 통번역사로서의 자부심이나 자존심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불어를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이미 만족한 상태라 다른 조건들은 크게 따지지 않았다. 며칠에서 몇 개월씩 한 회사에 장기간 출근해서 일을 할 때는 번역을 하는 중간중간에 복사나 커피 심부름과 같은 잡무를 하기도 했고, 특정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일을 할 때는 직원들의 저녁 회식에도 종종 참여했다. 물론 추가 수당을 받기는 했지만 야근이나 철야도 굳이 피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이렇게까지 하는 통번역사가 은근히 드물다. 철저하게 정해진 시간에만 일하고 칼같이 퇴근하거나 다른 직원들과 전혀 교류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쩌면 내가 학교에서 그리 뛰어난 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의식 중에 이런 부수적인 노력을 기울였는지도 모른다. 오로지 실력만으로는 이 업계에서 나의 입지를 굳힐 수 없겠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을 수도 있다.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는 나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이 최고가 될 수는 없기에, 모든 사람이 최고가 되기 위해 달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저마다 가진 장점과 단점을 잘 조합해서 각자에게 가장 잘 맞는 삶을 꾸리면 된다. 나의 경우에는 자기 객관화가 너무 잘된 나머지 처음부터 꿈을 작게 가졌던 것, 그 꿈에 쉽게 만족을 했던 것, 무의식적으로 나마 부족한 실력을 다른 것들로 메꾸려고 노력했던 것 덕분에 나만의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통번역대학원을 나왔다고 해도 의외로 통번역 일을 업으로 삼아 꾸준히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경기의 흐름을 많이 타는 직업인 탓에 고정적인 수입이 보장되지 않아 일찌감치 다른 직업으로 갈아탄 동기가 여럿이고, 특히 여자들은 결혼과 출산과 육아를 겪으면서 상당수가 경단녀가 되어버렸다. 프리랜서는 일을 한 두 번 거절하기 시작하면 결국에는 일이 끊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왜 한번쯤은 최고가 되어보려 끝까지 노력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가끔씩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항상 적당한 수준을 유지했던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생각도 한다. 일을 완전히 놓지는 않겠다는 의지로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감사하게 받았고, 일의 전문성을 잃지 않는 선에서는 최대한 게으르고 느슨하게 살았다. 최고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애초부터 없어서 좀처럼 무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여기까지 라도 올 수 있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