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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Apr 27. 2020

처음이라 막막하시죠?

당신의 백지를 응원하며, Latte가.

나는 평균 2년정도 걸리는 자격시험을 준비했다. 운이 좋게 가까스로 합격을 했고, 대개의 합격자들이 그렇듯 합격 초반 끓어오르는 열정을 주체 못하고 별의별 일들을 벌렸다. 그 중 하나가 수험생들의 답안을 검토하고 채점하고, 피드백을 주는 일이다.

1년에 한번 있는 시험이 반년도 남지않은 때에, 나의 합격이 얼마지나지 않은 때에 한 답안지를 펼치게 됐다.

거의 백지에 목차를 잡고 싶은데 도저히 잡을 수 없어 듬성듬성 단어 몇개를 써서 낸 수험생의 답안지. 

중간중간 '...' 과 못 쓰겠다는 푸념이 적혀있는 답안지. 

결과적으로 50점 만점에 4점을 받은 수험생의 답안지..


아직 수험생 시절의 터널증후군이 남아있는 나는 백지답안지를 보니 도저히 남 일 같지 않았다.
시험이 4달 좀 더 남은 이들이 문제를 받아들고 느낄 답답함과 막막함, 두려움들..

나는 심지어 시험 한달 전 모의고사에도 거의 백지를 냈고, 해온 게 아까워서 남은 시간 열심히 해보자는 마음으로 시험을 마저 봤던 거였다. 심지어 시험당일, 첫번째 과목의 한 꼭지를 거의 통째로 날려먹은 터라 합격자 발표가 기다려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다행히, 아주 운이 좋게 붙었다. 혹시 내가 한달 전 모의고사 결과를 보고 포기를 했더라면, '역시 나는 안돼'하며 시험장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테고, 1년 여의 혹독한 수험생활이 악몽으로만 남았겠지. 


답안지의 주인이 마치 시험을 한달 앞둔 나처럼 느껴져서, 어떻게든 다독여서 시험장으로 끌고 가고 싶은 마음에 주절주절 피드백을 적었다.


처음이라 그래요.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거잖아요.
처음을 지나는 과정이 너무 길고 외롭겠지만 힘내길 바라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있거든요.

그런 마음이 전해졌으면 싶었다.  


공무원고시, 임용고시, 자격고시, 로스쿨고시..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고시를 통해 노동시장에 진입하려고 시도하고, 노력한다. 매년 쏟아지는 합격자의 몇 십, 몇 백배 많은 사람들이 불합격의 통보를 받고 좌절한다. 다시 일어날 힘이 남아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고시낭인'이 된다. 시험만능주의사회에서 자신의 능력을, 평생 열심히 살아온 자신의 삶을 시험점수로 평가 받는 이들. 요즘 세대에게 주어지는 현실이 너무 잔인하다. 주변에서 누군가 시험을 준비한다면, 나처럼 멘탈이 쿠크다스라면, 모아둔 돈이 많거나 집에서 뒷받침이 되지 않는다면 더더욱, 고시지옥에 절대 발 들이지말라고 뜯어말리고 싶다. 하지만 그것 말곤 별다른 대안이 없으니 나 역시 시험을 준비했던 게 아니던가. 피할 수 있다면 피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이들의 현실을 너무도 잘 알아서 쉽게 말할 수가 없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끔찍한 시간들을 이겨내라고 부추기는 현실이 너무 미안하다. 그것말고 다른 선택지를 제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더 나은 대안이 어딘가엔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아직 모르지만. 하지만 아직 대안은 요원하고, 현실은 냉혹하니 당신도 이 답안지를 들고 앉아있는 거겠지. 너무도 잔인한 현실이 미안하지만, 그럼에도 간절히 바란다면 꼭 그 끝에선 따뜻한 햇살 한 모금과 선선한 바람 한 줄기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당신이 처음 발을 내딛는 사회가 너무 잔인하고 밉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좌절 보단 성취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기를 바란다. 


답안지 첨삭은 체질과 맞지 않으니 당장에 그만뒀다. 내가 누구에게 피드백을 줄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자기객관화가 뒤늦게 이뤄졌다. 합격 이후 4년이 지난 지금 드는 생각은, 시험이 마라톤의 완주지점인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것. 철인 무한종경기랄까. 힘들게 달려왔더니 새로운 도구를 주고 다시 달리라고 한다. 우리의 삶이 끝나지 않는한, 어쩌면 삶이 끝나도, 완주는 없는가보다. 우린 끝 없는 시작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조금 힘빠지는 말일지도 모르겠는데, 너무 '꼰대'같은 말인 걸 잘 아는데, 내가 생각하는 삶은 그런 것이다. 이런 과정들은 얼마전 후기를 남긴 책에서 나온 말처럼 '대나무의 마디' 같은거지. 조금은 아픈 마디를 지나면 조금 더 단단해지기를. 좀 더 행복하기를. 좀 더 높은 곳에 닿기를. 마디마디 삶을 쌓아가는 당신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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