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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Jan 27. 2022

집,착

01. 마당이 작은 집

내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택한 방법이 왜 하필 집이냐는 의문이 들 것 같다. 오히려 집에 집착하지 말고 버는 돈으로 좀 더 풍요롭게 살면 되지 않느냐, 저축해서 만일을 대비하는 게 낫지 않나 생각할 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 생각들이 정답에 더 가까우리라고도 생각한다. 그걸 알면서도 난 집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이유를 설명하기엔 꽤나 긴 이야기가 필요하겠다.


 기억 속 첫 집은 지상2층, 반지하1층 짜리 다세대주택이었다. 우리집은 반지하, 1층은 집주인이 살고 한 층은 다른 임차인이 살던 집이었다. 우리집은 건물을 돌아 난 돌계단을 밟고 가야 현관문이 나왔다. 내 생각에 그 집은 내 마음에 퍽 들었던 것 같다. 거창한 마당은 아니지만 현관으로 연결된 은 시멘트계단이 아닌 돌계단이었고, 달동네이긴 했지만 그래서인지 그나마 어렴풋이 이 들기도 했다. 집 앞엔 공용 평상이 놓여져있어 동네 사랑방 구실도 했고, 방도 세개나 됐다. 학교와 걸어서 5분 거리였고, 3분 거리엔 작은 공원도 있었다. 어차피 내 세상은 학교 집 공원이 전부여서 슈퍼나 병원 같은 편의시설이 먼 것쯤은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 추억은 미화된다더니, 그래서인지 그 집에 대해 떠오르는 큰 불만이 없다. 벌레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 같고, 곰팡이가 엄청 피지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단 하나, 지금도 소름끼치는 좋지 않은 기억이 그 집에 대한 그리움을 훼방놓는다.


우리집은 딸만 다섯, 엄마까지 총 여섯명의 여자가 있다. 유일한 남성은 부친뿐이다. 그런 우리집에 20대의 남성들이 방을 나눠쓰고 살았다. 둘이었나 셋이었나 기억은 나지 않는데, 그 남성들은 부친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떻게보면 흔하디흔한 하숙이지만 생판 남인 성인 남성들과 어린 딸들이 함께 지내도록 한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들과 우리는 현관문도, 거실도, 화장실도 함께 썼다.


어느 비오는 날이었다. 부친과 엄마는 늦은 시간까지 잔업을 하고 있었다. 집엔 그들과 우리뿐이었다. 당시 내 나이는 8살, 언니는 11살, 그리고 나보다도 어린 동생들 셋. 그들 중 하나가 나에게 파워레인져를 보여주겠다고 안방으로 데려갔다. 언니는 나에게 그거 보지말고 자기랑 같이 엄마아빠한테 가다. 난 싫다고, 이거 볼거라고 하는데 언니가  사정을 한다. 그 남성은 욕을하고 손을 들어 손찌검(을 했는지, 시늉만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난다)을 하더니 언니를 데리고 나갔다. 이후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지는 모르겠지만 언니 울면서 엄마아빠한테 갔다. 그게 그 기억의 전부다. 그 당시엔 정말이지 아무 것도 몰랐다. 언니가 왜 저러지? 내가 파워레인저 좋아하는 걸 모르는 건가?? 어린 마음에 언니가 내가 좋아하는 걸 보는 게 싫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울며 가는 언니를 보며 당연히 마음은 불편했지만 언니를 이겨먹은 것 같아 통쾌한 마음도 들었던 것 같다.


지나고나서야, 설마.. 하는 마음이 들 뿐이다. 언니가 왜 울면서까지 날 데리고 가려고했는지는 정확히 얘기해 본 적이 없다. 언니가 부모에게 알리러 가지 않았다면 나에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수십번 수백번 언니와 그날의 일이 대해 얘기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못했다. 혹시나 언니가 정말이지 몹쓸짓을 당했던거라면 어떡하지, 여전히 두려운 마이 더 크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우리들이야 그런대로 지냈지만, 2차 성징을 겪는 니에게 그곳은 쉽지 않았구나, 이제야드는 생각이다. 그런 집을 떠난 건 9살의 여름. 97년 IMF 금융위기의 여파를 뒤늦게 맞은 것인지 집 근처에서 운영하던 부모의 공장이 좀 더 외딴 곳으로 옮겨졌고, 우리는 열가구가 사는 다세대주택의 반지하로 이사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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