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도 안하고 뭐했어 그럼? 졸업하면 학자금 바로 갚아야되는데 졸업만 하면 그건 누가 갚아줘요
시집가면 남편한테 갚아달라하면 되지? 빚더미인 애를 데려다 살 남자가 어딨어요
그런 남자면 만나지도 말어 옛날에는 돈 주고도 데려갔어 그럼 저 팔려가라고요?
대학을 다니며 오랜만에 들른 할머니댁에서 할머니와 이 대화를 나누고나서 결혼소식을 알리기 전까지 할머니댁에 가지 않았다. 대체 어느 시대를 사는거야.
결혼 전 마지막 집은 집주인의 2층짜리 주택에 세들어 산 1층집이었다.
1층이라고는 하지만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창문을 열면 옆집 창문이 손에 닿을정도라, 공사장이 있는 쪽 작은방 창문 말고는 열고 지낼 수 없어서 반지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래된 낡은 주택이라 곰팡이도, 벌레도 있었다. 화장실 천장이 낮아 고작 157센티 키인 나도 고개를 숙여야 했다. 전 집에선 화장실이 좁아 서서 겨우 씼었다면, 이번 집은 천장이 낮아 서서 씻을 수가 없었다. 옆집엔 장애가 있는 가족이 살았고, 새벽엔 그 집 딸의 비명이 좁은 골목을 채웠다. 그집 부친의 가정폭력이라고 했다. 경찰도 몇번 왔다는데, 장애가 있어 경제활동을 전혀 하지 못하는 모녀를 보호할 제도도, 기관도 없다고 했다. 사람들은 신고해봤자 그집 양반 화만 돋운다고 차라리 눈감아줬다. 배려이지 못한 배려들로 날카로운 밤들이 지나갔다.
대학교 수업이 끝나고 일찍 집에 온 날. 우편함도 모자라 바닥에 우편물들이 널부러져있었다. 뭐가 이렇게 많아. 보니 죄다 엄마의 이름으로 온 우편물이다. 열개가 넘는 우편물을 들고 방에 들어가 하나하나 펼쳐봤다. 00캐피탈 연체 알림 언제까지 상환하면 이자를 제해주겠음, 언제까지 가스요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가스공급이 중단됨, 건강보험 헤택을 유지하려면 언제까지 체납 보험료를 납부하라, 00카드 현금서비스 이용대금이 연체중임... 이게 다 얼마야.. 하다하다 사채까지 썼다니.. 엄마가 밥을 먹으로 집에 들렀을때 얘기를 꺼냈다. 엄마 사채썼어? 엄마가 알아서 할거야. 뭘 어떻게 알아서 할건데. 저거 다 돈내라고 온것들이야. 엄마가 무슨 돈이 있어서 저걸 어떻게 알아서해. 아빠 사업 좀 제발 때려치라고해. 차라리 경비라도 하면 안돼? 돈만 안가져가도 이렇게까진 안해도 되잖아. 너한테 돈달란 소리 안해. 신경쓰지마. 이미 돈 다 가져갔으니 돈달란 소리 못하는거잖아. 너까지 왜그러니? 그만좀해!!! 엄마의 방법이라는 건 파산신청이었다. 엄마는 도박도, 사업도, 사기를 당한것도 아니지만, 일을 쉬어본 적도 없지만, 파산을 했다.
대학을 다니며 알바를 하고, 학자금 생활비 대출까지 받으면서 집을 벗어나려고 했다. 휴학을 하고 일을하면서 돈을 벌었다. 아침이면 옆방과 모닝콜을 같이 들어야하는 고시원에 살며 일을했다. 하지만 학생임을 숨기던 것이 밝혀져 해고를 당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고, 도저히 고시원에서 다시 살 자신은 없어서 집에서 오가며 한학기동안 돈을 벌었다. 벌어놓은 돈으로 학자금대출도 일부 갚고, 다음학기 생활비도 했다. 휴학과 복학을 오가는 동안 제대로된 스펙은 없이 나이만 많은 취준생이 되었다. 제대로 된 직장을 얻기 힘들었고, 마지막 휴학을 하고 자격사 시험을 준비했다. 도저히 집의 상황을 보면서는 마음이 복잡해 공부가 안될 것 같아 지방에 취직한 동생에게 회사에서 내준 원룸방에 같이 기거하면서 공공 도서관을 다녔다. 그러다 엄마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 몸이 천천히 굳어가는 병이라고, 아직 치료법이 없다고. 쥐구멍엔 볕이 뜨지 않는구나.
시험 반년 전 학원가 근처에 보증금 100만원, 월세 41만원짜리 원룸방을 얻어 지냈다. 공부하는 동안은 다 잊고 합격만 생각하자. 공부기간 늘어나는게 서로에게 손해다. 모아놓은 돈 떨어지면 공부 더하고 싶어도 못한다. 1년안에 승부보자. 1년 잊고 합격해야 나중에 진짜 길바닥에 내 앉을때 방이라도 한칸 내줄수 있을거다. 엄마 병원비 내줄 사람이 나밖에 없을수도 있다. 이기적인 선택이었지만, 나에겐 그게 유일한 희망으로 보였다. 다행히 목표한 시기에 합격을 했고, 애인도 비슷한 시기에 목표하던걸 이뤘다. 둘다 바로 취업을 했고, 자리를 잡고 바로 결혼을 준비했다. 엄마는 꾸준히 약먹으며 증상을 늦추는것말곤 방법이 없었고, 엄마는 부친을 포기하지 못했고, 동생들도 같이 살고있고. 나는 내 삶을 살자. 간간히 엄마와 동생들을 챙기는 걸로 자위하면서 내 인생이 새롭게 시작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결혼을 두달 앞둔 어느날, 문자가 왔다. 아무님의 계좌 입출금이 제한되었습니다. 자세한 문의는... 자매들의 단체 메신저방이 난리가 났다. 스팸문자 아닐까? 은행 공식 CS센터에 연락해보니 정말이었다. 건강보험 미납금이 800만원이 넘는다. 계좌를 동결시켰다. 오늘안에 납부하면 풀어주겠다. 건강보험료가 세대원 연대책임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돈도 안벌던 10년전부터 연체가 어떻게 되느냐 따져물었다. 건강보험료는 태어나는순간부터 연대책임이라고 한다. 따져물을 말도, 방법도 없었다. 당장 계좌가 묶이면 안되니 남편이 자신의 마이너스 통장으로 일단 내자고 한다. 엄마, 이게 다야? 더 있으면 제발 지금 말해. 괜히 이자만 더 불리지말고. 없어. 진짜야. 엄마가 미안해. 진짜 없지? 엄마한테 이럴게 아니지. 아빠 바꿔. 언제까지 이러고 살거야. 왜이렇게 내 발목을 못잡아서 안달이야.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테니까, 제발 내 인생에서 좀 꺼져. 불효녀라고 욕해도 상관없다. 못된 년으로 살기로 했다. 도저히 용서가 안되니까. 엄마가 아픈것도, 내가 가난의 굴레를 끊어내지 못하는 것도 다 저 인간의 탓이니까. 본인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가족의 희생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인간을 초등학교 고학년때부터 아빠로 인정할 수가 없었으니까. 나한테 아빤 없느니만 못한 존재니까.
할머니의 말이 사실이 됐다. 집의 빚을 결혼도 전부터 남편이 갚아줬고, 남편까지 구렁텅이에 몰아넣는것같아 결혼을 접을까도 생각했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어쩌면 도피처처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남편의 안정적인 경제력이 결혼을 결심하는데 크게 작용했다는 걸 부정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이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나와 새로운 가족을 꾸리자는 사람이 있었고, 어쩌면 둘이 벌어 살다보면 남들처럼 사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속물이랄지도 모르지만, 가난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지말라는 법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기적이게도 '나라도' 행복하고 싶었다. 남편과 둘만의 섬에 살고 싶었다.
내가 모른척하고 나와버린 그곳은 여전히 가난하고 동생들은 그 집의 가장이 되어 나의 몫까지 짐을 짊어지고 있다. 외면하고 싶었고, 동생들이 있기에 그럴 수 있었다. 이기적이게도, 가난을 남겨둔채 나는 집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