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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Dec 09. 2022

엄마, 살아줘서 고마워

05. 재건축을 앞둔 아파트의 전세살이

2023년 1월. 나는 새로운 집을 분양 받아 이사를 간다.

남편과 무리해서 당시 우리의 모든 신용을 글어모아 산 첫 집, 21평짜리 복도식 아파트의 가격이 많이 올라준 덕분에 29평짜리 낡은 아파트로 이사를 한 지 1년 반만이다.

아주 운이 좋게 취소분에 당첨이 되어 32평짜리 새 아파트로 가는 두 번째 이사.

아직 집을 사고 파는 일이, 그에 따르는 부수적인 것들을 해내는 일이 많이 버겁지만 나의 집이 점점 나아지고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크다.


지금 사는 곳은 서울이지만 이사갈 집은 고양시에 있다. 때문에 집단대출을 받으려면 고양시를 오가야 했다. 광역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달려 서류를 내고, 수십장의 서류에 서명을 하고, 다시 가서 서류를 고치고, 서류를 보완하는 일이 꽤나 고되지만, 불평하기엔 역시 배부른 감이 있다.


광역버스를 타고 한강을 가로질러 가는데 창밖의 해가 너무 눈이 부시다.

바로 볼 수 없을만큼 쨍한 햇빛, 그 해를 기를 쓰고 받아내는 한강.

너무 눈이 부신 그 광경에 마음 한 켠이 저릿하다. 집을 생각하면 자꾸만 생각나는 사람. 나의 삶이 평온하고 충만할수록 자꾸만 눈에 밟히는 사람. 나의 엄마때문이다.


나의 엄마는 지금 결혼 전 내가 살던 동네에서 가장 대단지에 기본 평수도 넓은 아파트에서, 오래 소원하던대로, 살고있다. 작은 동네였지만, 좀 산다하는 사람들은 죄다 그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우리 가족은 생각했었다. 그 아파트에 우리 집이 있다는 것, 정말이지 동경하던 일이다.


나의 엄마가 그렇게나 동경하던 집에 살고 있는데 왜 마음을 쓰느냐고 의아할 지 모르겠다. 실토하자면 엄마가 그 집에 살게 된 건 그 오래된 아파트가 재건축하기로 되면서 집주인들이 떠나고, 집을 비워두기 뭐하니 집을 부술 때까지만 살라는 조건으로 헐값에 전세를 놓은 덕분이다. 그 전세금조차 중소기업에 다니는 동생이 중소기업 근로자 대출지원을 받아서 낸 것이고, 환갑이 넘은 엄마를 동생들이 자신들의 삶을 양보하고 모시는 중이니 어찌 맘이 좋을까. 그런데다 엄마는 그나마도 이렇게 볕이 잘 드는 집에 살아서 '행복하다'고 염불을 외듯 중얼거리신다. 30년 넘게 몸이 닳도록 일해놓고 본인 이름으로 집 한 칸 가지지 못하고, 언제 허물지 모르는 집에 자식들에게 얹혀 살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엄마가 너무 밉다.


어릴 땐 그냥 싫었다. 이렇게 가난한 삶이, 우유값도 내지 못해 매달 이름이 불리는 삶이, 생일에 케이크 한 번 못 먹는 삶이, 부모 직업을 뭐라 쓸지 한참을 망설이는 삶이, 친구를 집에 데려오지도 못하는 삶이, 용돈 없는 삶이, 메이커 없는 가방과 운동화가 부끄러워 부모에게 화를 내는 삶이 싫었다. 그런데 이제 내 삶에 안정이 느껴지니 조금 다른 생각이 든다. 내가 그렇게 싫었는데 엄마는 얼마나 싫었을까.


나의 삶은 고작 비참했을 뿐이지만, 엄마의 삶은 절망이었겠지. 끝도 없이 부친의 사업은 망하고, 아들 낳으라는 시부모 성화에 건사할 자식은 다섯이나 되고, 집은 볕도 들지 않고 바퀴벌레가 우굴거리고, 그마저도 전세금을 말아먹고 보증금을 까먹어서 자식들의 이름으로까지 돈을 빌려 내 집에서 전세로, 전세에서 월세로 쫓겨나고, 백원짜리도 궁해서 다 썩어가는 채소를 떨이로 얻어와 겨우 밥을 차리고, 자식 급식비며 공과금이며 건강보험료며 카드값이 죄다 밀려 하루에도 수번을 독촉전화를 받는 삶은 고작 절망이란 말로도 부족할 것 같다. 사람이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희망이 없을때라고 생각한다. 우울증 치료까지 받아보니, 그 막막함을 이겨내는 건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었겠구나, 싶다. 더구나 엄마는 정신과 치료도, 주변의 도움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외롭게 그 시절을 버텨냈는지 감히 짐작이 가지 않는다.


지나가겠지, 나아지겠지.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을해도 통장에 돈은 쌓이지 않고, 오히려 빚만 늘어나는 삶에, 자식들은 머리 커가면서 요구하는 것만 많아지고, 부친은 하루가 멀다하고 돈 내놓으라고 하고, 고된 하루살이에 제대로 눈 붙일 시간도 없어 버스정류장이며, 지하철이며, 머리만 댈 수 있다면 습관적으로 선잠을 자야했던 엄마는 뭘로 견딘걸까?


엄마는 부친이 30년 내리 사업을 말아먹는 동안 사채까지 써가며 사업자금을 대고 집안을 건사했다. 이번엔 진짜다, 이번에 군에 납품만하면, 특허만 받으면, 이번에 얼마만 더 투자하면... 어려운 살림의 다섯째 딸이던 엄마는 주간에는 일을 하고 야간에는 고등학교를 겨우 다녔다. 그런 엄마에게 부친은 명문 '공고'를 나왔다는 유세로 온갖 가스라이팅을 하며 자신의 위세를 지켰고, 깨지 않는 꿈을 꿨다. 당연히 부친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고, 엄마를 회생까지 하게 만들고도 정신을 못차리고 여전히 야망을 좇고 있다. 그런 부친의 생활비까지 동생들이 대는 것이 못 마땅해 제발 좀 내쫓으라고, 이혼까지 한 마당에 왜 데리고 사느냐고 닥달해도 엄마는 그 인간을 내보낼 생각조차 않는다.


엄마 또한 부친과 다르지 않은걸 일확천금을 꿈꿨나?

남편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나만은 끝까지 지지자가 되어주고 싶은 엄마의 사랑이었을까?

자식들에대한 무거운 책임감이었나?

쉽게들 얘기하듯 '죽지못해 산'걸까?

무한한 긍정에너지로 삶의 긍지를 실현한걸까?

그 고된 시절을 대체 어떻게 견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잘 모르겠다. 그저 차라리 죽는 게 쉬웠을 지 모를 엄마가 아직까지 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엄마는 맘 편히 몸 누일 집 한 켠 없이 30년을 살아왔지만, 나에겐 존재만으로도 따뜻한 집이었. 여전히 당신 이름의 집 한 칸 없지만, 당신이 눈 감는날까지 내가 당신의 집이되겠노라. 나의 집에 대한 집착은, 물론 집 없는 설움을 떨치고픈 나의 강한 욕망이지만, 세상이 전부 당신을 밀어내고 저버려도 언제든 갈 곳이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주길 바라는 당신을 위한 보루다. 나의 집은 당신의 작은 몸이 맘 편히 누워도 되는 세상 유일한 비빌 언덕이다. 이런 나의 진심을 당신이 부디 알아주기를. 엄마, 우리 집으로 가자.

집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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