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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y Oct 22. 2021

프러포즈

단편소설


- 어머, 어머, 멋있다. 아유, 어쩜.


아내는 아직도 청춘 드라마를 보면 부러워 죽는다. TV 속에선 젊고 잘 생긴 남자가 어리고 예쁜 여자에게 프러포즈를 하는 장면이 한창이다. 참고로 아내는 낼 모레면 오십이다. 쯧쯧, 혀를 찰 노릇이다.


- 나도 저런 프러포즈 한번 받아 봤으면…


60인치 UHD TV를 아내에게 뺏긴 나는 코딱지만한 스마트 폰으로 유튜브를 보는 중이다. 지난주 드라이버 훅 때문에 골프 내기에서 져서 생돈 이십만 원을 날렸다. 다음주에는 상무님과 접대골프를 쳐야 한다. 비싼 연습장에 매일 갈 순 없으니 열심히 봐두기라도 해야 한다.


정수리 언저리에서 아내의 시선을 느끼고 나는 고개를 슬쩍 들었다.


- 왜, 또.

- 나도 저런 프러포즈 받아보고 싶다고.


아내는 걸핏하면 프러포즈 타령이다. 프러포즈를 제대로 못 받고 결혼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나, 뭐라나. 하여튼 나잇값을 못한다.


- 내가 그렇게 쉽게 결혼해주는 게 아니었어.


또 시작이다. 아내의 프러포즈 타령이 시작되면 아무 구도 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 내가 얼마나 잘 나갔는지는 당신이 더 잘 알지? 도서관에 가면 남자들이 서로 옆자리에 앉으려고 난리였다고. 나랑 밥 한번 먹으려면 번호표 뽑아야 했고.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는 속으로 주문을 외우며 아내의 타령이 제발 빨리 끝나기만 기다린다.


- 프러포즈 못 받고 결혼한 건 너무 서운해.


갑자기 아내의 목소리가 다운된다. 나도 모르게, 하지 말았어야 하는 구를 하고야 만다.


- 프러포즈했잖아.

- 언제, 언제?


아뿔싸! 다 죽은 불씨를 내가 되살린 셈이다. 이젠 어쩐다? 일단 최선을 다 하자.


- 그때, 전화로 내가 결혼하자고 하니까, 당신이 그런다고 했잖아. 그게 프러포즈지, 프러포즈가 뭐 별거야?

- 전화로? 그게 다야? 정말 너무해.

- 뭐가 너무해.

- 아이고, 내가 이렇게 무드 없는 사람하고 살아요. 칫.


아내는 단단히 토라져서 부엌으로 휙 가버렸다. 쿵쾅쿵쾅 발소리에 감정이 단단히 담겨있다. TV에서는 왜 이런 거창한 프러포즈를 매번 보여주나 모르겠다. 지난 드라마에선 빌딩 벽면에 있는 광고판에 “00야 사랑해, 나랑 결혼해줘” 하더니, 오늘은 동남아 어디 해변가를 몽땅 빌려서 돈지랄을 하고 있다. 이젠 TV보기가 겁나 죽겠다.


- 프러포즈가 뭐가 중요해? 이렇게 잘 살면 되지.


잠자리에 들면서 아내에게 말을 건넸다.


- 됐어. 칫.


아내는 잘 토라지지만 단순한 성격이다. 토라졌을 때 잘 달래주면 금세 풀린다.


- 참, 당신 생일이 이번 주 금요일이지?

- 왜? 나 선물 사 줄려고?

- 그럼. 우리 마눌님 생일 선물 사줘야지. 지난번에 무슨 스웨터 사고 싶다고 했잖아. 그거 사줄까?

- 아냐, 그거 싫어졌어. 영민이 엄마가 입고 있더라.

- 그래? 그럼 다른 거 생각해봐.

- 음. 생각났다.

- 뭔데?


‘너무 비싼 거면 안돼’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지금은 참아야 한다.


- 프러포즈해줘.

- 또 그 소리야?

- 내가 감동할 만큼 근사한 프러포즈.

- 뭔 소리야! 생일 선물이나 얼른 말해.

- 그래, 생일선물. 멋진 프러포즈.

- 장난치지 마.

- 아무튼 난 말했어. 잘 준비해봐. 기대할게.


아내는 어이없어하는 내 표정에 ‘맛 좀 봐라’하는 미소를 보내고는 금세 잠이 들었다. 내가 늘 먼저 잠들어 아내가 코를 고는지 몰랐는데, 아내가 코를 곤다. 아내도 늙나 보다. 그러게 큰 애가 벌써 고등학생이다. 아내 말마따나 결혼 전에 아내가 얼마나 예뻤는지 까맣게 잊고 살았다. 컴컴한 천장을 바라보니 가슴이 답답하다. 프러포즈라. 도대체 프러포즈가 뭐길래, 결혼한 지 이십 년이 다 되가는 이 시점에 이런 고민을 해야 하냔 말이다. 에이.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지난밤에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 늦게 잠이 들어서 인지 늦잠을 자 버렸다. 월요 회의가 있는 날이라서 평소보다 일찍 가야 하는 날인데, 지각이다.


- 깨우지 그랬어.

- 깨웠어, 자기가 안 일어나 놓고는. 나보고 뭐라 그래.


세수도 하는 둥 마는 둥. 옷만 대충 차려 입고 현관문을 나서는데, 아내가 따라 나서며 방글방글 웃는다. 뭔가 할 말이 있을 때 아내가 하는 행동이다.


- 나 늦었어. 뭐. 빨리 말해.

- 프러포즈.

- 아, 됐어. 바빠 죽겠는데.


아내에게 눈을 위아래로 흘겨주고 현관문을 꽝 닫고 집을 나왔다. 막 떠나려는 마을버스에 간신히 올라탔다. 바쁜 아침에 출근하는 남편에게 ‘프러포즈’라니. 아내가 미친 게 아닐까? 생일선물이고 뭐고 다 취소다!


마을버스를 바로 탄 덕에 지각은 면했다. 지하철로 삼십 분만 더 가면 되니까 9시전에 사무실에 골인할 수 있겠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아내의 말이 다시 떠오른다. 프러포즈. 미친 척하고 스마트 폰을 꺼내 검색 창에 프러포즈를 입력해 본다. 아니, 이게 다 뭐야? 마치 내가 ‘프러포즈’를 검색하기만 기다렸다는 듯이 엄청난 광고들이 주르륵 이어졌다. 파티와 이벤트를 대행해 주는 업체가 수십 개가 넘고 프러포즈 장소를 대여해 준다는 광고는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서너 개 중에 하나를 고르는 건 쉬워도 수백 중 딱 한 개를 고르는 건 너무 어렵다. 뭐 하나라도 잘못 클릭했다간 밑 빠진 독에라도 빠질 것 같은 심정이 되어 얼른 스마트 폰 화면을 꺼버렸다.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해서 앞으로 어떻게 잘 살까 하는 고민 보다 남들에게 보여주기식 화려한 이벤트에 열광하는 것 같다. 쯧쯧, 혀를 차며 맘 속으로 요즘 세태에 한바탕 비웃음을 퍼부어 주려는데, 아내가 배웅하며 한 말이 다시 떠올랐다. 프.러.포.즈. 아내가 이렇게 고집스럽게 뭔가를 요구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내는 뭐든 혼자 잘하는 편이라 집안 일이건 애들 일이건 내게 특별히 부탁하지도 않았다. 그런 아내가 갑자기 프러포즈에 꽂혔다. 이를 어쩐다?


연달아 회의를 2건 하고 나니 벌써 점심시간이다. 점심 먹고 한 숨 돌리려 하는데, 재무팀 박 대리가 양복을 쫙 빼 입고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


- 와. 쫙 빼 입으니까 멋지다. 오늘 선보러 가나?

- 차장님, 저 장가갑니다.

- 오. 축하해.

- 이달 마지막 주 토요일입니다. 오셔서 맛있는 뷔페 드시고 가세요.


박 대리와는 작년에 어려운 프로젝트를 함께하며 동고동락을 했던 사이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해서 언제 여자 친구 사귀고 언제 결혼하냐며 걱정했는데, 한참 안 본 사이에 좋은 인연을 만들었나 보다.


- 암, 꼭 가지.

- 감사합니다. 꼭 오세요.

- 참, 박 대리. 자네 프러포즈라는 거 했나?


바빠서 잊고 있었던 아내의 프러포즈 타령이 떠올라 물었다.


- 했죠.

- 그래? 어떻게 했나?

- 에이. 쑥스럽게.

- 쑥스럽긴, 말해봐.


청첩장만 주고 가려는 박 대리를 옆자리에 앉히며 내가 말했다.


- 사실은, 내 마누라가 요즘 노망이 들었는지, 갑자기 프러포즈를 해 달라고 난리가 아냐.

-프러포즈 안 하셨어요?

- 뭐, 대충. 우리 때는 다 그랬어.

- 저도 간단하게 했어요. 호텔 레스토랑에서 와인 마시며 식사. 돈 좀 썼죠.

- 그 정도 하려면 얼마나 드나?

- 30만 원 좀 넘게 들었던 것 같아요.

- 우아, 그렇게나 많이?

- 그건 식사 값만 그렇고요. 꽃다발에 선물에. 그거 다 합치면 배는 더 될걸요.


외벌이에, 차장 월급이라 봐야 빤하다. 요즘은 애들 학원비가 장난이 아니어서 내 용돈도 반납할 지경이다. 지난 주 내기골프에서 쌈짓돈까지 다 날렸으니 호텔에서 한 끼 식사로 몇 십만 원 날릴 처지는 절대 아니다. 오후 내내 근심 가득한 내 얼굴을 보았던지 앞자리에 앉은 한 과장이 묻는다.


- 차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 아니. 무슨 일은.

- 얼굴 표정이 안 좋으셔서. 상무님이 또 뭐라세요?

- 아니야. 참, 한 과장, 자네는 결혼할 때 프러포즈했나?

- 프러포즈요. 워낙 오래된 일이라. 하긴 한 것 같네요.

- 그래? 우리 마누라가 삐칠만 하고만.

- 사모님요? 왜요?

- 프러포즈 못 받고 결혼했다고, 이제 와서 프러포즈해내라고 난리야. 이번 주 금요일이 마누라 생일인데, 생일 선물로 프러포즈를 해달라네. 참, 네. 어이가 없어서.

- 해 드리세요. 요즘 다이아몬드 값 많이 내렸다는데, 하나 사드리세요.

- 다이아몬드?

- 네. 전 결혼반지 미리 주는 셈 치고, 다이아몬드 반지 사 줬어요. 프러포즈할 때.

- 그래? 그 반지 값이 얼마나 하는데?

- 워낙 오래 전 일이라서. 저도 요즘 반지 값은 모르는데. 그래도 몇 백은 하지 않을까요? 다이아몬드 크기가 캐럿은 돼야 하잖아요. 사모님 소셜 포지션도 있고.


몇 백만 원이라. 갈수록 태산이군. 프러포즈 한번 하려다가 몇 년치 용돈 거덜 나겠군. 에이 몰라, 프러포즈는 무슨. 오늘 집에 들어가면 다시는 프러포즈의 ‘프’자도 꺼내지 못하게 해야지.


회식이 있어 10시가 넘어 집에 들어가니 아내가 쓰레기 봉지와 씨름을 하고 있다.


- 뭐해?

- 왔어요?

- 뭐해, 낑낑대면서.

- 쓰레기 내다 버리려고.


아내는 쓰레기 봉지 위에 쓰레기 봉지만 한 비닐봉지를 하나 더 달아서 테이프로 붙이고 있다. 헐렁헐렁하게 채워져 버린 쓰레기 봉지를 보면 낭비한다며 주절대는 아내다.


- 쓰레기 봉지 한 장 그거 얼마 한다고.

- 작은 것부터 아껴야지.

- 그래, 우리 마누라 만세다.


빈정대듯 이야기했지만, 아내가 아니었으면 서울 외곽이라도 내 집 갖고 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식구들이 모두 나가고 집에 혼자 있으면 절대 보일러를 틀지 않고, 식구들 쫓아다니면서 안 쓰는 전등을 끄고 다니는 아내. 어찌 보면 지지리 궁상을 떨며 사는 아내가 생일선물 대신 해달라는 프러포즈. 참, 생각할수록 안 어울린다.


다음날 점심시간. 한 과장이 묻는다.


- 차장님, 프러포즈는 잘 돼가세요?

- 오. 차장님 프러포즈? 새 장가가세요?


이대리의 농담 섞인 질문에 한 과장이 기특하게도 나를 돕자고 말을 꺼낸다.


- 이대리, 결혼한 지 이제 3년 돼가나?

- 그러네요. 벌써 그렇게 됐네요.

- 와이프한테 프러포즈 어떻게 했는지 말 좀 해봐? 지금 차장님이 사모님께 프러포즈 압력을 받고 계시대. 우리가 힌트 좀 드리자고.

- 전 한강에 있는 선상 레스토랑 한대 빌렸죠.

- 선상 레스토랑?

- 한강에 떠 있는 레스토랑들 있잖아요.

- 아, 나도 그거 본 적 있어.

- 평일 저녁에 2시간 통째로 빌려서 제 친구들하고 와이프 친구들하고 한 20여 명 모여서 파티하고 신나게 놀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적에 제가 와이프에서 프러포즈를 했죠. 무릎 꿇고 그런 거 있잖아요. 이 이벤트의 가장 큰 장점은 와이프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방에 사서 환호하는 분위기 때문에 청혼에 대한 답을 즉시 받을 수 있다는 거죠. 성공률 100%.

- 오호라.

- 단점은 돈이 좀 많이 든다는 거죠.


돈이면 다 해결되는 세상인데, 문제는 돈이 없다. 이래서야 아내를 감동시킬 수 있는 프러포즈를 할 수나 있을까?


- 유니 씨는 어떤 프러포즈 받고 싶어?


한 과장이 아직 미혼인 막내 사원에게 물었다.


- 음. 저는요. 해변가에 둘만을 위한 테이블을 만들고, 테이블 위에는 레드 와인과 멋진 스테이크. 모래사장에 파도가 스르륵 스르륵 왔다 갔다 하고. 바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고, 그때, 제 남자 친구가 저한테 반지를 주는 거죠. 엄청 큰 다이아몬드 반지.

- 그건 지난 주말 드라마에서 나왔던 거잖아.

- 그럼 어때요. 아무튼 멋지잖아요.


매스컴의 힘이 크긴 크다. TV에서 본 것을 꿈꾸는 여성들이 많아지면 힘들어지는 것은 남자들 아닌가! 그때 김 과장이 한마디 한다.


- 차장님, 네이버에 한번 물어보시죠.

- 네이버?

- 네이버에 궁금한 거 물어보면 답해주는 서비스가 있는데, 정말 기발한 답이 나와요. 거기 한번 물어보시죠.


저녁 7시가 되자 직원들이 하나 둘씩 퇴근을 하고 김 과장과 둘만 남았다.


- 김 과장, 아까 말한 거, 네이버에 질문 올리는 거, 어떻게 하는 건지 좀 알려줄래?

- 아, 그거요? 엄청 쉬워요.


김 과장이 알려준 대로 네이버에 질문을 올리고 사무실에 혼자 남았다. 삼십 분쯤 지났을까. 질문 올린 지 얼마나 됐다고 반신반의하면서 확인해 보니, 있다, 있어! 벌써 답변이 2개나 달렸다.


[질문] 40대 후반 남성입니다. 갑자기 와이프가 프러포즈를 해 달라고 하고, 안 해주면 집을 나가겠다고 하여, 다 늙어서 프러포즈를 해야 합니다. 어떻게 프러포즈를 하면 좋을까요? 멋진 아이디어 기다리겠습니다.


[답변 1] 1. 커다란 상자에 비싼 화장품을 왕창 사너으세요. 2. 침실 조명을 좀 분위기 있게 바꾸고 3. 적땅히 분위기 잡아지면 준비한 선물을 전해주면 뿅~ 와이프, 집 안 나가길 빌께요~


[답변 2] 저희는 님과 같은 고민을 해결해 드리는 이벤트를 기획/실행하는 이벤트 회사입니다. 연락 주시면 즉시 고민 상담/해결을 약속드립니다. T:010-000-0000


오호. 이거 재밌는데… 철자법도 엉터리고 내용도 두서 없지만 이렇게 빠르게 답변이 달리는 걸 보니 또 어떤 답변이 올라올지 기대됐다. 좀 있으니 답변이 또 달렸다.


[답변 3] 그 나이에 무슨 프러포즈입니까? 그냥 돼지갈비 실컷 사주고 마십시오. 안 그래도 살기 힘든데, 프러포즈는 무슨 개뿔.


뭐야 이건. 누가 설교해 달래? 답변할 게 없으면 그냥 말 것이지, 이런 답변은 왜 달어? 화가 나서 컴퓨터를 확 꺼버렸다.


11시가 다 되어 집에 들어가니, 아내는 보이지 않고 딸 은지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다.


- 은지야. 아직 안 잤어?

- 학원 숙제가 너무 많아.

- 엄마는?

- 엄마? 아까 안방에 들어가셨는데, 주무시나?


아내가 잔다니 다행이다. 얼굴을 보면 프러포즈 얘기를 또 할 것 같아서 안 그래도 피할 방법을 찾던 중이었다.


- 은지야. 아빠 좀 도와줄래?

- 뭔데?

- 이번 금요일이 엄마 생일이잖아. 엄마가 아빠 보고 프러포즈를 해달란다.

- 프러포즈? 엄마랑 아빠는 이미 결혼했잖아.

- 그러게 말이다. 아무튼, 내일 엄마한테 어떤 프러포즈를 받고 싶냐고 물어 볼래? 아빠가 시켰다고 하지 말고. 알았지?

-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근데, 아빠, 나 데이터 다 썼어. 1기가만 쏴줘.

- 벌써? 아직 월초잖아.


아빠의 잔소리가 시작되려 하니 딸의 낯빛이 어두워진다.


- 알았다, 알았어. 모처럼 아빠가 부탁하는데, 조건을 달다니, 섭섭하다.

- 앗싸. 원래 모든 거래는 가고 오는 게 있어야지. 그럼 전 이만.


마케팅 제1법칙 : 고객이 원하는 걸 알려면 고객에게 직접 물어보라! 아내가 뭘 원하는 지는 아내에게 직접 물어보아야 하지만, 직접 물어봐야 말 안 할 테니, 이럴 땐 메신저로 딸을 활용해보자.


다음 날 아침 딸에게 미션에 대해 다시 상기시키고 출근을 하는데, 어제와 다르게 아내가 조용하다.


- 어디 아파?

- 아니야. 그냥 좀 기운이 없어서.

- 나 갔다 올게.


어제는 프러포즈, 프러포즈하면서 사람을 몰아세우더니 오늘은 아픈 사람처럼 비실거린다. 내가 프러포즈해 달라는 소리를 그냥 잊은 줄 알고 미리 실망하는 건가?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출근하는 발걸음이 무겁다.


출근하자마자 PC를 켜고 네이버에 접속하여 어제 내가 남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확인했다. 간밤에 2개의 답변이 더 올라와 있다. 제발 영양가 있는 답변만 있기를 기대하며 답변 확인을 클릭했다.


[답변 4] 맘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뭐 답이 있겠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아내분께 어떤 프러포즈를 원하냐고 물어보시고, 그대로 해 주시는 것이 답일 듯.


[답변 5] 학교 운동장에 하트 모양으로 촛불 켜고, 거기로 아줌마를 불러서 노래해 주고 선물 주고 하면 좋을 것 같아용.


마지막 답변은 아무래도 초등학생인 것 같다. 네이버를 믿은 내가 바보지. 이젠 정말 믿을 구석이라고는 딸 은지밖에 없다. 은지야 아빠는 너만 믿는다.


오후 6시가 다 되어 갈 때, 은지에게서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 아빠.

- 어. 그래 엄마가 뭐라든?

- 무지무지 로맨틱한 거면 좋겠대.

- 그게 뭔데?

- 그래서 나도 로맨틱한 게 뭐냐고 물어봤더니. 엄마도 모르겠대.

- 그게 뭐야?

- 몰라, 아무튼, 난 미션 수행 끝.


딸은 학원수업시간이라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이젠 방법이 없다. 내가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아내에게 직접 물어봐서 그대로 해주자.


모처럼 일찍 퇴근을 하니, 아내가 저녁상을 차리고 있다.


- 오늘은 일찍 왔네. 밥 안 먹었죠? 식사하세요.

- 와. 맛있겠다.

- 뭐 좋은 일 있어요?

- 좋은 일은 뭐.


아내는 아침보다는 한결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아 보였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 아내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 여보, 로맨틱한 게 뭐야?

- 로맨틱?

- 어, 요즘 여자들은 로맨틱한 거 좋아한다며. 그게 뭐야? 이번 제품이 여자를 위한 것이라서, 내가 고민을 좀 하고 있거든.

- 사랑 받는 느낌 같은 거 아닌가? 자신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느낌. 뭐 그런 거 아니겠어?”


아내는 몸살 기운이 있다며 약을 먹겠다고 방을 나갔다.


사랑 받는 느낌이라. 점점 더 어려워져만 가는 것 같다. 아내가 사랑 받는 느낌과 함께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프러포즈라. 이제 3일밖에 안 남았다.


오늘은 꼭 프러포즈에 대한 결론을 내리라 다짐하면서 출근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장님 공장 방문에 수행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것도 1박 2일이란다. 이제 프러포즈고 뭐고 다 물 건너 갔다. 사장님 수행업무를 하면서 언제 프러포즈 아이디어를 내고 선물을 사냔 말이다. 아내의 실망하는 모습이 벌써 눈앞에 선하다.


출장을 마치고 퇴근하니 아내가 반갑게 나를 맞아 준다. 선물 준비를 못하고 있어서 그런지 나는 아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가 잠자리에 들었다. 이젠 다 끝났다. 내일이 아내 생일인데.


아내가 방에 들어오는 인기척에 잠자는 척하는 나를 보며 아내가 말한다.


- 여보, 프러포즈 선물 말이야. 그거 신경 쓰지 마. 내가 오버한 거야. 여보, 자?


나는 자는 척 코 고는 시늉을 한다. 아내가 포기한 모양이다.


금요일. 오늘은 아내의 생일이다. 출근을 하면서 일찍 퇴근할 테니 저녁 같이 먹자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오늘도 마음이 무겁다.


사무실에 와서 이제는 소용없다는 생각에 네이버에 올렸던 질문을 삭제하려고 접속했는데, 새로운 답변이 등록되어 있다는 메시지가 있었다.


[답변 6] 40대에도 그런 낭만을 지닌 부인을 두셨으니 행운아십니다. 저는 2년 전에 아내와 사별했습니다. 저 역시 아내에게 변변한 프러포즈를 못 해준 게 한이지요. 제가 아내에게 해주고 싶었지만 못해준 프러포즈가 있는데,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제 아내는 바다를 좋아했어요. 폭죽을 한아름 사서 밤바다 모래사장에서 몇 시간이고 아내만을 위한 폭죽 잔치를 해주고 싶습니다. 폭죽이 터질 때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뭔가 무거운 것으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그냥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내가 프러포즈를 생일 선물로 해달라고 했을 때에는 그냥 작은 이벤트 정도로만 생각했다. 이 답변을 읽으니 아내에게 무엇을 해줘야 할지를 알게 되었다.


퇴근 후 곧장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니, 외식을 하자던 내 말에 아이들과 아내가 외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은지야, 은수야. 오늘 외식 취소다. 오늘은 엄마하고 아빠만 데이트 간다. 집 잘 보고 있어. 당신, 옷 좀 따뜻하게 입어. 엄마 아빠 많이 늦을 테니 문단속 잘하고 자고 있어. 그럼 내일 보자.


어리둥절해하는 아내의 손을 잡고 현관문을 나서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 우리 바다 보러 가자.

- 바다?

- 그래, 바다. 바다 가서 프러포즈해 줄게. 생일 선물로.

<끝 : 2021 영등포문예 최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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