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알마티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를 가로지르고, 높디높은 산을 넘고서야 비로소 당신의 심장에 발을 디뎠다. 세상 모든 곳에 당신의 품을 내어줬기에, 여기만큼은 조금 황량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러나 이제는 안다. 당신은 아름답지 않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여기는 카자흐스탄, 알마티(Almaty)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관문이자, 유라시아의 심장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곳. 수도를 옛 아스타나(Astana) 지역, 그러니까 누르술탄(NurSultan)으로 옮기기 전까지 카자흐스탄의 중심지였던 곳. 여전히 중앙아시아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는, 카자흐스탄의 최대 도시라는 자부심이 있는 곳. 아니, 이렇게 설명을 장황하게 하기엔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이 너무도 소소하잖아. 오후 두 시. 알마티의 가을볕을 마주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시간은 없었다.
거리에 나서보기로 했다. 늘 그랬듯이. 이건 내게 있어 일종의 의식과도 같은 행위다. 그 장소에 서서히 나를 적응시키기 위한, 나만의 방식이랄까. 의식은 간단하다. 마주치는 이들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주변을 둘러본다. 버스는 어디에서 탈 수 있는지, 숙소 앞 전철역에서는 어디로 갈 수 있는지 등등을 살핀다. 괜찮은 펍이 있으면 좋고, 아침을 즐길 수 있을 만한 카페까지 있다면 환영이다. 그게 아니라면 또 어떠랴. 편의점이나 영어가 통하는 구멍가게라도 있으면 일단 안심이다. 이렇게 두리번거리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곳의 분위기에 녹아들기 위함이다. 현지인과 여행자 사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도록.
숙소 주변 정찰을 마친 뒤에는 조금 더 먼 곳에 도전하기도 한다. 그 지역 사람들이 자주 모이는 광장 같은 곳이라면 일단 1순위다. 그런 장소라면 쇼핑이나 먹거리가 적당히 자리할 테고, 현지인의 삶을 더욱 가까이에서 만나볼 수도 있으니까. 으리으리한 고층빌딩은 없어도 된다. 꼭 가봐야 할 랜드마크가 있더라도 일단은 제쳐둔다.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면 충분하다. 알마티에서는 아르바트(Arbat) 거리가 제격이었다.
알마티의 중심가 중 한곳이라는 아르바트 거리는 적당히 북적였다. 마침 주말 오후여서인지 그 여유를 즐기려는 이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친구를 만나서 재잘거리는 학생들의 얼굴에도, 분수 사이를 오가는 아이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했다. 한쪽에 자리를 잡은 화가들은 이러나저러나 붓끝에 집중하고 있었고, 문을 활짝 열어둔 식당에서는 이제 막 점심 영업을 정리하는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문득, 이제야 조금씩 알마티에 녹아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어디에서 왔어요? 자, 이거 먹어봐요. 그냥 주는 거예요.” 시장에 들어서자 좌우로 도열해 있는 상인들이 손길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의 손에 이끌렸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견과류를 하나씩 시식하고야 말았다. ‘아, 이러면 왠지 사야 할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상인이 바구니를 들고 견과류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게 맛있어요? 저건 어때요? 다 맛있죠?” 그의 친절이 철저히 ‘상업적’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기꺼이 그의 호객 행위에 호응해주기로 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지출 발생. 그래도 괜찮다. 그들은 그저 그들의 일을 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시장은 활발했다. 이 현대적인 분위기의 전통 시장은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한단다. 깔끔한 건물 내에 질서 있게 자리를 잡고 있어 ‘전통’이라는 단어와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였지만, 이곳에서 장사하는 상인들만큼은 아마 오래전의 모습 그대로일 터였다. 상인과 손님 사이에 오가는 대화만큼은 영락없이 전통 시장의 그것이었다. 흥정은 기본이고 덤은 센스라는 공식에 따라서 말이다.
과일과 견과류를 시작으로, 각종 고기를 파는 정육 코너, 심지어 꽃과 화분을 파는 원예 코너도 준비되어 있었다. 푸드 코트처럼 여러 먹거리를 파는 매대도 눈에 띄었는데, 카자흐스탄에 많다는 고려인들도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었다. 잡채와 김밥, 김치와 고추장이라니. 외국의 낯선 전통 시장에서 한국 음식을 만나는 것만큼 묘한 일도 없구나 싶었다. 여기가 카자흐스탄인지, 서울의 광장시장인지 헷갈리는 풍경.
시장이 훤히 내려다보일 것 같은 2층으로 도망했다. 몇 번의 호객 행위를 더 경험한 뒤였다. 한국인이라는 사실만으로 호기심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2층에서 영업 중인 작은 카페 구석이라면 평화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곳에서 안드레아(Andrey Yakimov)를 만났다. 그는 카자흐스탄 로컬 커피 로스터리 브랜드 ‘보울러 커피 로스터즈(Bowler Coffee Roasters)’의 질뇨늬 바자르(Zelenyy Bazar) 지점을 책임지는 바리스타였다. “여기 좀 정신없죠? 그래도 재미있는 곳이에요.” 안드레아가 말했다. 커피 한 잔 값에는 그의 재미있는 이야기도 함께였나 보다.
밀리터리 브로치를 만드는 공예가로 활동하다가 커피를 배워 정식 바리스타가 되었다는 그는 자신이 소개된 잡지까지 보여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커피를 내리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단다. 그러기에는 커피가 너무 맛있는 게 아니냐며 칭찬을 건넸더니, 한참을 멋쩍어하던 안드레아. 겸손을 보이는 법도 안다. “저는 제가 제일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것뿐이에요.” 나는 그에게 엄지를 들어 응원했고, 그는 손으로 하트를 그리며 화답했다. 카자흐스탄에서 브로맨스를 느끼게 될 줄이야.
질뇨늬 바자르(Zelenyy Bazar)
- 위치: Жибек Жолы проспект, 53, Almaty
- 전화번호: +7 7272 73 62 82
- 영업시간: 09:00~19:00 (매주 월요일 휴무)
“점심은 여기에서 먹을 거예요.” 가이드 세르게이(Sergey)가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 도로를 한참 달리고서야 겨우 만난 마을이었다. “위구르족 마을이에요. 여기에서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까지 그리 멀지 않거든요.” 친절한 가이드 세르게이는 내가 묻기도 전에 궁금해하고 있을 법한 이야기를 설명했다. “아, 그럼 저희가 지금 국경 쪽으로 가고 있는 건가요?” 세르게이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셈이죠. 알마티 시내에서도 동쪽으로 한참 왔어요. 여기에서 여덟 시간만 더 가면 신장 위구르 지역이에요.” 가깝다며? 여덟 시간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거야? 새삼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넓다는 카자흐스탄의 광활한 땅덩이가 실감 나고야 말았다.
허름한 식당에 들어섰다. 낡아 보이기는 해도, 이 근방에서는 제일 그럴싸했다. 양고기 굽는 향(이건 향이라고 해야 옳다)이 식당 주변을 뒤덮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어도 좋았다. 입구를 지나며 세르게이에게 속삭였다. “저, 양고기 샤슬릭(Шашлык, Shashlik,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즐겨 먹는 꼬치구이)은 무조건 먹을 겁니다.” 식당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약간의 기다림 끝에 등장하는 중앙아시아 사람들과 위구르족이 즐겨 먹는다는 음식들, 그리고 샤슬릭. 다른 것보다도 먼저 샤슬릭을 잡아들었다. 밖에서 맡았던 바로 그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침이 고였다. 나는 지체 없이 꼬치에 꽂혀 운명을 기다리는 양고기를 하나씩 빼내었다. 곧이어 날카로운 포크가 양고기 쪽으로 돌진했고, 머지않아 입 안 구석구석 따끈한 육즙이 스며들었다. 아, 카자흐스탄. 마음에 든다.
바이세이트 시장(Байсеит, Baiseit Market)
- 위치: A351, Байсейіт
작은 언덕을 지나 시작된 협곡이 저기 수평선 멀리까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곳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지구의 변덕이 찢어낸 상처였다. 조금 더 깊숙이 들여다보기로 했다. 차린캐니언(Charyn Canyon)이라고 불리는 이곳엔 지면에서 150m 내지 300m 깊이로 패인 협곡이 무려 154km에 달하는 길이로 형성되어 있단다. 대략 서울에서 대전까지 이런 협곡이 이어진다고 보면 되시겠다. 지각 변동이 있었고, 그 자리에 강물이 흘러 지금의 모습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수억 단위를 우습게 넘나드는 게 지질학 이야기인데 여긴 고작 수천만 년 전에 생겨난 지형이라니. 아직 젊구나. 왠지 때깔이 곱다고 느껴지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는 터라 모든 구간이 사람들에게 개방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이 그러하듯이, 차린캐니언의 주요 지점에도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고, 헬리콥터 투어도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여행자에게 허락된 2.5km 길이의 트레킹 코스를 걷지 않을 수는 없잖은가. 흙먼지 날리는 길을 따라 마냥 들어가기로 했다. 사실 그 속살을 들여다보는 게 제일 짜릿한 일이니까.
계단을 따라 내려온 길은 협곡 사이를 따라 쭉 이어졌다. 막상 왕복으로 이 길을 끝까지 다녀오자니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저 멀리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부한카(буханка) 트럭 한 대가 보이기 전까지는. 사람들을 잔뜩 태우고 달리는 걸 보니 아마도 셔틀 같은 개념일 터였다. 좋아. 돌아오는 길엔 저걸 이용하면 되겠어. 그렇다면 여유가 생겼다. 조금 더 천천히 걷기로 했다.
길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길에서 만난 여행자들이 적절히 상상력을 가미한 덕택이기도 했다. 그들의 이야기에 따르자면, 좁고 긴 이 협곡 위로는 날렵하게 생긴 우주선 두어 대가 레이저를 쏴대며 날아다닌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영화 <스타워즈>의 유명한 우주선 추격 장면처럼 말이다. 그들의 농을 듣고 있자니 화성이나 다른 외계 행성을 마주한다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계인이 나타나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딘가를 지그시 응시하는 마녀와 하늘로 고개를 치켜든 용도 있었다. 누군가가 그럴싸하게 생긴 바위들을 보고는 이름을 붙였다나. 바위에 이름을 붙이는 건 여기도 마찬가지구나.
다음 날, 다시 시내를 벗어났다. 도시 외곽의 전형적인 풍경이 보이는가 싶더니 구불거리는 산간 도로에 진입했다. 좌우로 심하게 요동치는 차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빠르게 도착하기만을 바랄 뿐. 세르게이의 말에 따르면 무려 해발고도 2,500m 지점까지 올라가야 한단다. 알마티 중심지의 고도가 800~900m 정도임을 고려해도 약 1,700m를 차량으로 등반하는 셈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구불거리는 도로를 따라서. 몸을 감싸고 있는 안전벨트를 세게 조였다.
정말이지 구불거려도 너무 구불거렸다. 멀미가 없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이렇게까지 해서 무슨 호수를 보겠다는 건가. 속으로 투덜대기도 했다. 그러나 세르게이는 그 어느 곳보다도 자신감이 넘쳤다. 정말 예쁜 곳이니까 조금만 더 참아달라고. 그의 자신감에는 분명 이유가 있어 보였다. 시내를 벗어나고도 꼬박 한 시간을 더 오르고서야 빅알마티레이크에 도착했다.
호수는 중앙아시아와 중국 동부 지역에서 신성시하는 티엔샨을 배경으로 영롱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옥빛이라는 이야기가 절로 나올 정도로 비현실적인 색을 품은 호수였다. 옛날에 있었던 지진이 만들어 낸 풍경이란다. 둘레만 해도 3km, 깊이는 40m에 이를 정도로 거대한 호수가 산속 한가운데에 있다니. 만년설이 쌓인 산꼭대기에서부터 흐르는 물이 한데 모여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비탈을 따라 내려갔다. 가까이에 다가가도 그 색깔이 그대로일지 궁금했다. ‘아니, 정말 말이 안 되는 색깔이잖아.’ 세르게이에게 30분만 둘러보고 돌아가겠다고 했던 게 무색해졌다.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마냥 호수를 감상했다. 이 바위 위에도, 저 바위 위에도 올랐다. 마음에 드는 바위 하나에 걸터앉아 넋을 놓아보기도 했다. 되돌아가는 길이 쉽지 않을 걸 알면서도 굳이 물가까지 내려가 손끝을 적셨다.
한동안 멍했다. ‘그림 같다’는 표현이 진부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이 풍경을 어디에 비해야 할지 지금도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와 그때 당시에 파노라마로 찍은 사진을 보고 있자니, 미술관의 한쪽 벽을 큼지막하게 장식하고 있는 거대한 유화를 보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래, 현실 세계에서는 여태껏 볼 수 없었던 풍경이라고 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