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공노비보다 10만 유튜버
‘공노비’ 그리고 ‘사노비’
죽어라 공부해서 공무원 합격, 스펙 열심히 쌓아서 대기업 합격. 국가를 위해 일하느냐 회사를 위해 일하느냐에 따라 뒤에 따라붙는 ‘노비’. 잘 먹고 잘 살자고 몇 년간을 고군분투했는데 결국 우리가 얻는 신분은 노비에 불과했다. 심지어 자기 자신을 거리낌 없이 노비라고 칭한다. 인스타그램만 봐도 #오늘도 나는 노비 #공노비 월급 받는 날 별의별 태그를 붙이면서 본인이 노비임을 공표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그들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해야만 하고, 그에 상응하는 월급을 받는 신분.
‘ 제 꿈은 100만 유튜버예요! ’
새로운 신분이 생겨났다.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는 1인 기업가. 새롭다기보다는 음지에 묻혀있던 직업군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은 느낌이랄까. 장래희망 기재란에 의사, 변호사, 선생님이 탑 오브 더 탑이었는데 이제는 필요 없단다. 의사 가운, 법복, 제복보다는 이제는 실버 버튼을 받겠다며 아우성이다. 적어도 ‘사’ 자가 붙은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20년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시간의 갭, 나이의 갭이 존재했는데 이젠 초등학생 1학년도 유튜브에 뛰어들다 보니 성인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인 시간의 갭이 무너져버렸다.
그러니까 전문적 giver가 아닌 사짜 giver. 재무설계사가 해주던 재테크 상담을 짠순이 짠돌이 유튜버가 절약부터 시작해 재테크까지 모든 과정을 보여주고, 요리 전문가가 알려주던 요리 방법들보다 누군지도 모르는 유튜버가 알려주는 간단한 요리법을 찾게 된다. 심지어 개그맨보다 초딩 유튜버가 더 재미있으면 그만이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고 학벌이 무슨 상관인가.
아니, 시대가 변했다고. 그것도 아주 많이.
수험생 시절 노량진에 무료 강의를 들으러 갔던 때. 추운 겨울날 얼어붙은 콩나물 대가리처럼 노란 대가리만 대롱대롱 보이는 교실. 아무튼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선망했던 이화여대 필통을 즐겨 쓰고 있었다. 지방대를 나와 공시생 시절까지. 저렴했고 가벼웠고 필기구가 훤히 보여서 쓰기 용이했다. 명문대는 이런 것도 잘 만드나 보다. 아마 이화여대 학생이라면 바로 알아볼 터.
쉬는 시간이었다. 누군가 커피를 건넨다. 훗, 이게 바로 공시 학원가의 썸...?이라고 생각하려던 찰나 그 커피를 건넨 상대방은 여자임을 확인했고, 커피 컵 홀더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저도 이화여대 벗이에요. 어서 빨리 이 생활 탈출해요! 같이 힘내요!’
이화여대는 서로를 벗이라고 부름을 알았고. 내 행동거지뿐만 아니라 소지품으로도 오해를 살 수 있음을 알았다.
내가 동경해왔던 이화여대.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한마디로 이미 학교의 위상을 설명하는 그 학교. 명문대 출신 학생도 지방대를 나온 나도 같은 교실에서 9급 공무원 강의를 듣고 있었다. 대학에 따라 인생의 서열이 결정될 것만 같이 이야기를 듣고 자라왔는데 10년 후에 다시 또 똑같은 수험생 신분으로 같은 교실에 앉아있었다.
‘좋은 대학에 가야 잘 먹고 잘 산다’
‘좋은 직장에 가야 잘 먹고 잘 산다’
결국에 저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잘 먹고 잘 사는 누군가가 있는 한편, 좋은 대학에 들어가도 9급 공무원 준비를 하고, 대기업에 들어가도 못해먹겠다고 뛰쳐나오는 판국이 되었다.
- “적금이요? 투자하셔야죠.”
은행을 믿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은행에 돈을 넣어두면 바보 멍청이가 되는 시대가 되었다. 여기저기서 투자를 하라고 외치고 있다. 과거 ‘주식’이라는 단어를 보면 한탕주의를 바라는 사람들의 단어처럼 보였고 ‘부동산’이라는 단어를 보면 투기처럼 보였다. 과거에는 ‘절약’만 하면 어느 정도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었건만 ‘절약’에 더해 ‘투자 공부’까지 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 “9급이면 5급 마인드로 일하세요.”
평범하고 성실한 나는 10년 지기 친구도 평범하고 성실했기에 둘 다 공무원이 되었다. 적응에 고군분투 중인 친구를 말단이라고 칭하겠다.
“말단 씨, 지금 몇 급 마인드로 일해요?”
“9급이요.”
“아니요. 그 마인드로 일하면 안 돼요. 알려주는 사람이 없으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고, 내가 이 기관의 기관장이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일해야 해요. 그래야 상급기관에서도 말단 씨를 찾을 거고, 그게 평판으로 이어지고.. 직장에서의 커리어를 쌓는데 좋지 않겠어요? 몇 급 마인드로 일해야 할 것 같아요?”
(흔히들 말하는 공무원 인수인계가 그렇듯, 친구인 말단 씨는 어느 하나의 인수인계도 받지 못했고 전화 받이, 욕받이라는 서무업무를 맡고 있다.)
“8급이요.”
“아니요. 5급 마인드로 일해야 해요. 그래야 인정받죠.”
상급기관이 인정해주면 돈을 더 주나요? 그래서 그쪽은 인정받고 삶이 윤택해졌나요?
- “재능의 기준이 모호해졌다.”
내가 생각하는 재능이라 함은 그림을 특출 나게 잘 그리거나 체대를 갈 만큼의 운동신경이 있는 친구들이었다. 아니, 과거엔 그랬다. 인정받을 수 있는 수단이라고는 대학밖에 없었으니까. 반에 한 명씩 있는 그림 덕후, 운동 잘하는 애들. 그런 애들을 보며 나에겐 재능이 없으니 그나마 공평한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는 공부를 하자고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재능의 범위는 넓어졌다. 연애상담을 잘해주는 것도 재능이오,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많은 것도 재능, 옷을 잘 입는 것도 재능이 되었다.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가 해왔던 공부는 집어치우고, 새로운 공부를 해야 한다. 돈을 어떻게 굴릴 것인지에 대한 공부, 회사에 시간을 갖다 바칠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공부, 내 사소한 재능을 찾고 그것들을 2차 생산물로 만들어내는 공부.
그런데 사회에서 정한 공부만 해온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공부를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 4지선다, 5지선다의 답만 고르면 됐던 우리들에게 답이 없는 공부란 어렵다. 변한 게 너무나도 많다. 앞만 보고 달리면 그래도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또다시 다른 방향으로 달리라고 한다.
20대의 청춘을 바친 늦깎이 공무원이 자금이 있을 리가 있는가? 돈이 없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직장에서 보내야 한다. 시간도 없다.
재능이 있었으면 공무원을 했겠는가? 재능도 없다.
뭐 하나 제대로 가진 것 없을 때, 도대체 무에서 유를 어떻게 만들어내야 하는가?
+ 아, 그리고 이대생이 건네줬던 커피는 이대생 인척 하고 맛있게 먹었다. 벗도 지금 공공기관 어딘가에서 근무하고 있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