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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올라탄 시베리아 횡단열차
(하바롭스크-이르쿠츠크)

알릭셰 할아버지가 건네어 주신 딸기맛 비스킷

by 밍영잉

탑승 준비 끝


기차역으로 가는 길에 슈퍼에 들러 기차에서 먹을만한 음식을 몇 개 샀다.

물만 부으면 완성되는 으깬 파우더 감자 슾,

코코넛 슬라이스로 가득 찬 초코바,

통밀 비스킷,...


하바롭스크를 떠나 이르쿠츠크로 가기 위한,

이틀 하고도 9시간이 넘는 기차 여행에 대한 허술한 준비는 끝이 났다.


AC55C8C7-1151-45FD-B607-4E9F4EC2BD07_1_201_a.jpeg 하바롭스크 기차역


능숙한 승객


이번엔 기차에 올라타자마자 필요한 짐 몇 개를 뺀 배낭을 바로 좌석 아래에 넣고

나름 능숙하게 배급받은 침구 커버를 슥슥 씌웠다.

첫 횡단열차에서 만난 나의 스승님, 바리스 할아버지의 가르침 덕이었다.

그때 와는 사뭇 다른 능숙함이었다.


역시 배급받은 열차 컵을 들고 맨 앞칸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나탈리가 손수 만들어준 말린 허브 잎을 몇 개 넣어 우렸다.

평소에는 잘 마시지도 않던 차를

이곳 횡단열차에서는 끊임없이 마시게 된다.

뜨거운 물을 받으러 가는 길에 양 옆으로 보이는 승객들의 기차 생활이 궁금해서일까?

B90B36E3-4E7B-4346-8327-40EB008FB009_1_201_a.jpeg 나타리가 준 허브잎으로 만든 차


기차는 달리고 달려 첫 번째 밤으로 날 데려다줬다.

와이파이가 없는 것은 둘째치고 저녁이 되면 모든 불을 소등하기 때문에

휴대폰 화면을 붙들고 있기보단

침대에 누워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응시하다가

조금씩 흔들리는 기차에 몸을 맡기고 잠에 들었다.




이른 아침 눈을 떴다.


해가 뜨기 전 열차 안은 적막했고 공기는 차가웠다.

이 공간에 스미는 은은한 주황빛 조명이 있어

그래도 마냥 시리진 않았다.


어두운 남색 빛을 띤 두터운 구름은

그 어떤 것으로도 해리할 수 없을 듯했지만

찬란한 아침 해가 구름에 닿으니

거짓말처럼 무거운 구름은 흩어지고 연분홍 빛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CBDD0778-71D5-46F0-B017-A93776D58182_1_201_a.jpeg 이른 아침 사과
76B7DE93-81FC-4F06-9198-77FD08A10171_1_201_a.jpeg 창밖 아침 풍경


기차 탈출

이르쿠츠크까지 가는 열차는 한 시간에 한 번 간이역에서 멈추는데,

정차시간은 보통 단 2분이다.

주로 짧은 정차 시간이 반복되다 보니

이틀 동안 한 번도 열차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데


이르쿠츠크역에 도착하기 전

단 한번 길게 정차하는 울란우데역에서는

나갈 결심을 해봤다.


20170911_184530.jpg 정차 시간표


오랜만에 기차에서 내려 땅을 밟으니 이렇게 상쾌할 수가!

있는 힘껏 하늘을 향해 손을 쭉 뻗어 스트레칭을 한 후 걸음을 떼었다.

내 보복이 어색해서 아주 성큼성큼 걷게 됐다.


나만의 기차 탈출 미션은 역 내 매점에서 간식 하나를 사는 것이었다.

마침내 옆으로 지나가던 여성분이 쥐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유심히 관찰하고는

매점에서 똑같은 것을 골라 샀다.


'헉…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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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릭셰 할아버지 빠까!


어느덧 할아버지와 같은 칸에서 시간을 보낸 지 60시간이 다 되어갔다.

늘 마주 보고 밥을 먹고 자기 전에 굿나잇 인사도 하다 보니

이제는 구글번역기 없이 각자의 모국어를 사용한 대화가 가능하게 됐다.


"Как далеко вы остановитесь на следующей

CTaHuMM? "


"아~ 울란우데에서 20분(가위-주먹) 정도 멈추는 것 같던데요?

저도 나가보려구요."


할아버지는 내가 홍차를 마시기 위해 물을 떠 올 때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딸기맛 나는 비스킷을 내어주셨다.

처음 몇 번은 거절했지만 내가 먹을 때까지 책상에 비스킷을 올려두셨다.

계속되는 할아버지의 무뚝뚝한 다정함에 따뜻했던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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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작별 인사를 할 때, 알릭셰 할아버지는 통조림을 하나 꺼내셨다.


"이거 가져가서 먹어! 배낭이 조금 더 무거워지는 건 괜찮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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