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 에스토 쿼드 에스, 까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
우주가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세가지 선물과 근원적 고통
1. 생명과 함께 죽음을 주다
플라톤은 “와인은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말했지요. 와인의 입문서로 인기를 끈 일본 만화 <신의 물방울>은 이 말에서 따온 제목입니다. 우주가 인간에게 준 진짜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요? 뭐니뭐니해도 생명입니다.
무생물과 생물의 차이는 생명의 존재 여부입니다.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는 ‘생명은 소중하다’로 시작하는 ‘생명존중 선언문’에서도 ‘생명은 우리가 받은 최고의 선물이다’라고 말하고 있지요.
그런데 생명에는 반대급부가 있습니다. 바로 죽음이지요. 생명을 주는 대신에 죽음도 함께 주었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꿈꾸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근원적 고통, 첫 번째는 죽음입니다. 순간과 영원의 연결이 끊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고통의 원인은 무생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숙명 속에서 지혜롭게 사는 방법은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입니다.
메멘토 모리는 라틴어로 기억하다 memento와 죽음 mori 을 의미하므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췌장암에 걸렸던 스티브 잡스는 스탠포드대 졸업식 연설에서 “누구도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 위해 죽기를 원하지는 않죠. 하지만 죽음은 우리 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해 갈 수 없죠.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니까요. 죽음은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라고 말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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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뇌와 함께 이기심을 주다.
모든 생명체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생명에너지를 얻어야 합니다. 식물도 제 자리에서 광합성 작용만 해도 생존할 수 있지만 동물은 움직이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래서 움직일 동動자를 써서 동물이지요. 먹거리를 찾아다녀야 합니다. 식물은 먹거리를 찾아다니는 고민이 필요 없지요. 그래서 뇌가 없습니다. 동물과 식물의 차이는 뇌의 존재 여부입니다. 동물의 생존을 향한 마음의 뇌는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입니다.
동물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생명의 일부를 가져와야 합니다. 그런데 먹거리가 무한정 있는 게 아니지요. 먹이를 놓고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여야만 합니다. 동물이 이기적일 수 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난 것입니다. 일단 나부터 살고 보는 게 뇌의 역할입니다.
뇌는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몸 속 깊숙이 깜깜한 어둠 속에 숨겨두고 겉에는 딱딱한 방어막으로 둘러쌓지요. 그래서 있는 모습 그대로의 객관적인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자신만의 주관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지요.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주관적 인지편향이 세상과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타인과의 소통에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뇌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인지편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편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간의 근원적 고통, 두 번째는 관계의 불통입니다. 나와 타인의 연결이 끊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고통의 원인은 뇌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에서도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고 했지요.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은 소통입니다. 소통이 안되면 고통이 찾아옵니다.
이러한 숙명 속에서 지혜롭게 사는 방법은 에스토 쿼드 에스esto quod es 입니다.
에스토 쿼드 에스는 라틴어로 존재하다 esto, 하는 사람 quod, 자신 es을 의미하므로 ‘너 자신이 되라(be what you are)’는 뜻입니다.
진짜 속 뜻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싸우는 대신에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기를 실현하라는 말입니다. 존재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온전히 자기 자신일 때라 의미입니다. 미국의 신문 ‘뉴욕 타임스’도 밀레니엄 특집에서 지난 천년 동안의 가장 위대한 발견으로 ‘나’의 발견을 꼽은 적이 있지요.
에스토 쿼드 에스가 자기중심적 인지편향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기중심적 인지편향은 사회적 관계에 갈등과 투쟁을 가져오지만 에스토 쿼드 에스는 평화를 낳습니다. 진정으로 자기자신이 누구인지 안다면 너와 나 모두가 각자 아름답게 인생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 왜냐하면 너는 나의 일부이고 나는 너의 일부이기 때문이지요. 나의 경계가 주관에서 객관으로 확장됩니다. 이를 통해 자기중심적인 주관적 인지편향에서 벗어납니다. 주관적 인지편향은 ‘작은 나’의 관점을 버리고 ‘큰 나’의 객관적 관점을 가질 때 극복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개인의 삶을 사회적 성공으로 이끌게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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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래를 주고 현재를 빼앗다.
인간이 동물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인간을 특별한 동물로 만드는가’하는 점이죠.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절대이성의 존재가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만든다고 주장했습니다. 절대이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지요.
인간은 동물과는 다르게 미래를 예측하고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건의 인과적 사고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생각에 대한 생각은 인간 고유의 특성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메타인지능력이라고 부릅니다.
타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시간에 대한 메타인지능력 여부입니다. 영원한 시간을 생각할 줄 안다는 점입니다. 시간은 생명의 기간입니다. 영생 즉 생명의 영원성, 이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영성은 우주가 인간에게 준 준 최고의 선물입니다.
1년 뒤, 10년뒤, 100년 뒤의 미래를 걱정하는 동물은 인간뿐입니다. 대부분의 동물은 현재를 살뿐 미래를 위해서 저축하고 저장하지 않습니다. 의식이 없는 동물은 자극에 대해 현재시점에서 실시간으로 반응할 뿐이죠. 반면에 인간은 발달된 뇌 덕분에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은 자극에 대해 곧바로 반응하지 않고 미래에 미칠 영향을 판단한 뒤에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 대신에 미래에 대한 걱정, 불안, 근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사서 걱정한다’는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걱정을 많이 한다는 뜻이지요. 미래에 대한 걱정이 현재의 인생을 갉아먹고 있는 셈이지요. 과거에 대해 후회와 실망 그리고 미래에 대해 불안과 걱정에 잠 못 들고 생명에 이롭게 하라는 능력이 오히려 해로움을 끼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미래를 욕망하는 능력 때문에 현재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지요. 자신이 원하는 미래가 와도 또다시 더 나은 미래를 꿈꾸게 되므로 걱정과 불만족은 계속됩니다.
많은 노인들에게 ‘당신의 삶을 되돌아봤을 때, 가장 후회되는 점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너무 걱정하며 산 것’이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걱정하는 일의 90%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걱정하는 이유는 뭘까요? 뇌는 손실에 더 민감하기 때문에 10%도 치명적일 수 있다고 여깁니다. 불안감은 생존을 위한 무기이기도 한데 걱정하지 않는 게 맞을까요? 좋게 보자면 걱정한다는 것은 생존에 책임감을 느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지나친 불안감입니다. 지나친 불안감은 자신감을 잃게 합니다. 일상 생활에서 걱정은 현실도피이자 자기 위안일 때가 많습니다. 미래는 다가 오는데 행동하기 싫으니까 걱정하면서 자기합리화하고 있는 중이죠.
중요한 건 걱정한다고 해서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걱정해서 달라지는 것이 있나요? 걱정하면 시험에 합격할 수 있나요?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반대입니다. 불안과 걱정 때문에 집중이 안 되고 과도한 불안감으로 인해 실수를 반복하게 됩니다.
해결책은 뭘까요? 걱정 대신 준비 입니다. 시험에 붙으려면 걱정 대신에 철저히 준비하고 행동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미리 준비하면 걱정 뚝!
현재는 미래의 원인이고 미래는 현재의 결과입니다. 미래는 가상의 세계이고 현재는 실제 세계입니다. 힘은 현재에서만 실체화됩니다. 역설적이게도 미래를 잡는 최고의 방법이 현재를 잡는 것이지요. 미래에 대한 집착은 버리고 현재에 집중해야 합니다.
인간의 근원적 고통, 세 번째는 욕망의 불만족입니다. 현재와 미래의 연결이 끊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고통의 원인은 현재의 상태와 원하는 상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상태가 자신이 원하는 미래가 아니기 때문에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숙명 속에서 지혜롭게 사는 방법은 카르페 디엠carpe diem입니다.
카르페 디엠은 라틴어로 뽑다carpe와 날diem을 의미하므로 현재를 잡아라(seize the day)라는 뜻입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열연한 존 키팅 선생의 연설로 유명해졌지요. 노벨문학상과 풀리처상을 수상한 미국 작가 솔 벨로의 소설 제목이기도 합니다. 소설 속에 “과거는 아무 소용이 없어. 미래는 불안으로 가득 차있지. 오직 현재만이 실재하는 거야. 바로 지금, 오늘을 잡아야 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것은 아프리카 삶의 지혜에서도 나타납니다. 하쿠나 마타타 hakuna matata는 아프리카 스와힐리어로 없다hakuna와 문제matata를 의미하므로 ‘문제 없다’는 뜻입니다. 디즈니영화 라이온킹 에 나와 유명해졌지요. 진짜 속 뜻은 ‘걱정하지 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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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세 가지 선물과 고통을 모두 끌어안아라
우주가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세 가지 선물은 생명, 마음, 영성입니다. 그에 따른 근원적 고통은 죽음, 이기심, 불만족입니다. 이것들은 근원적인 숙명입니다. 인간의 근원적 고통은 관계의 존재로서 연결이 끊어짐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은 연결의 이음입니다. 순간과 영원의 연결, 나와 타인의 연결, 현재와 미래의 연결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러한 숙명 속에서 지혜롭게 사는 방법은 아모르 파티 amor fati 입니다. 운명을 사랑의 힘으로 끌어안는 것이지요. 아모르 파티는 라틴어로 사랑amor과 운명fati을 의미하므로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즐거운 학문>에서 한 유명한 말이지요. 진짜 속 뜻은 운명을 끌어안고 파도와 같은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하여 창조의 바다로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에스토 쿼드 에스는 아모르 파티로 통합될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걸 잊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나답게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운명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삶, 평화로운 삶, 행복한 삶으로 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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