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만들기 프로젝트
헤어지고 타로를 보러 다니는 이유
우리는 현대인이다. 그러나 현대인의 뇌는 원시인류의 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말인즉슨, 현대인류는 원시인류가 세상을 바라보고 체험했던 관점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원시인류는 세상을 주술적(신화적) 관점으로 체험했다. 즉, 천재지변을 신의 분노로, 가뭄에 비가 내리는 것을 신의 은총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현대인의 뇌도 이와 같은 원시인류였을 때의 뇌를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현대인이지만 이러한 주술적 사고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지고 난 후, 타로리더를 찾아가 재회가능성을 묻거나, 상대도 나에게 마음이 있을까요? 하고 묻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사주를 통해 이렇게 연인의 마음이나 재회가능성을 점치기도 하고, 그/그녀의 마음이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부적을 쓰기도 한다.
비단 연애와 관련된 문제에서 뿐만 아니라, 중요한 시험과 관련된 문제에서도 시험을 치고 난 후, 꼭 합격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거나 타로/사주/점술 같은 것을 보면서 자신이 합격하게 될지 묻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것들을 통해 스스로가 합격할지 떨어질지 알 수 있었다면, 시험을 치르기 전에 이미 사주나 타로를 보러 갔었어야 하는 게 맞다. 사주와 타로가 정말로 작동한다면, 붙는다는 점괘가 나온다면 어차피 공부를 안 해도 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붙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위의 말이 말도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모순적으로, 연인과 헤어졌을 때 우리는 타로를 보러 간다. 나보다도 내 연인에 대해 더 모르는 타인인 타로리더에게 연인이 돌아올까요? 연인의 마음이 어떠한가요?라고 묻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인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앞도적인 무력감 앞에서는 이렇게 주술적인 것에 기대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현대인이지만, 사실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찬찬히 놓고 보면 원시인류가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시인류가 주술적 사고를 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1. 양원사고와 삼원사고
과거의 인류는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기원전 2000년경까지만 하더라도 인류에게는 ’ 의식‘이라는 것이 없었다.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류인 우리는 ’ 의식‘이 없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 의식‘이 없다는 것은 간단하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개체‘로서의 자각이 없다. 즉, ’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한번 들어보자. 직장에 있는데 상사가 업무 내용을 정리해서 보고하라고 말한다. 보통은 그 지시를 따를 것이다. 이번에는 상사가 커피를 타오라고 말한다. 기분은 좀 나쁠 수 있지만 타다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상사가 자기는 먼저 퇴근할 테니 자기 몫의 일까지 하라고 하고 떠난다. 기분이 아주 나쁠 것이며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왜 이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을까? 그것은 상사가 떠넘긴 것이 상사가 할 일이기 때문이다. 즉, 내 일이 아닌데 나에게 자신의 일을 떠넘겼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나는 상사가 아니기에 상사가 해야 할 업무까지 단지 그렇게 ’ 명령‘했다고 해서 이행해야 할 이유가 없다. 나와 상사는 다른 ’ 개인‘이기 때문이다. 각자가 각각의 개인이기에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 인식일 것이다.
이제 상사가 ai에게 일을 시켰다고 생각해 보자. 상사가 챗 지피티에게 보고서의 내용을 요약하라고 시켰다. 상사가 챗 지피티에게 특정 주제에 관한 내용을 요약해서 설명해 달라고 말한다. 이때 챗 지피티가 “아 존나 내 일도 아닌데 왜 떠넘기는 거야 짜증 나게”라고 할까? 그냥 닥치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챗 지피티에게는 개체로서의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즉, 챗 지피티는 자아가 있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시키면 그것을 그대로 이행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ai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기원전 2000년 이전의 원시인류는 딱 이렇게 행동했다. ai가 명령을 생각해보지 않고 바로 이행하는 것처럼 이 당시의 인류도 내면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오면 그것을 ’ 생각하지 않고 ‘ 바로 이행하는 방식으로 뇌가 작동했다. 이 내면의 목소리가 바로 그 당시 인류의 뇌 구조 중 ’ 우반구‘가 만들어내는 명령이었다. 이것이 바로 원시인류가 들었던 ’ 신의 음성‘이다. 그리고 원시 인류의 뇌 구조중 ’ 좌반구‘는 이 명령을 받은 즉시 ’ 이행‘하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원시의 인류는 신의 명령이 들려오는 즉시 군말하지 않고 ai처럼 바로 따랐던 것이다.
이러한 원시인류의 특징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대한 서사 분석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는 의식을 가지게 된 이후의 인류이기 때문에 당시의 이야기를 현대적 관점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실제로 일리아스에서 드러나는 인류의 모습은 의식이 없는 양원적 문명의 특징을 보여준다. 즉, 고민과 갈등이 드러나지 않고 신의 명령에 따라 자기 행동을 실행하는 신체적 반응을 하는 것이다. 일리아스의 언어에는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가 없다. 이는 개인적 의식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라는 인식이 없기에 감정을 느낄 주체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2. 밈과 집단정신
인류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진화심리학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종의 종속은 개체의 행복에 우선한다. 즉, 자연생태계에서 종의 종속을 위해서 개체는 언제든 희생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를 진화심리학에서는 ’ 집단의식의 작용'이라고 한다. 집단의식은 다음의 두 가지 방식으로 개체에 개입한다.
1. 몸의 유전자 gene
2. 마음의 유전자 meme
밈이라는 단어는 들어보았을 것이다. 밈은 정신적인 유전자로 뇌에서 뇌로 퍼지는 특성을 지녔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의 뇌에 들어가 번식을 하게 되면 기존 사고체계과 가치관등을 변화시키며 그 사람 역시 meme의 숙주가 되게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해당 meme의 내용을 현실로써 체험하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유튜브에서 재미있는 영상을 보면 그것을 단톡방에 공유하는 것도 meme이 작용한 것이다. 예전에 너의 이름을 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유행한 적이 있다. 이때, 너도 나도 sns에서 “이것도 무스비....”라는 문구를 중얼 댔던 적이 있다. 뭐만 하면 댓글에 “이것도 무스비...”가 달리는 것이다. 이렇게 개인에게 받아 들려 지고 그 사람의 뇌에 자리를 잡은 정신적 유전자(meme)는 그 개인을 숙주로 삼아 주위로 퍼져나간다.
meme은 이처럼 단순한 장난 같은 내용으로 전파될 수도 있지만, 사상이나 신념 같은 수준의 meme도 있다. 예를 들어, 정치적 진보사상이나 보수사상, 페미니즘, 남성해방학, 운명주의 등등의 사고방식 또한 하나의 밈이다. 그리고 그 밈은 스스로가 번식할 수 있는 개체를 찾아 그 개체를 지배하며 그 밈의 숙주가 되게 한다. 그래서 밈을 다른 말로 밈 바이러스라고도 한다. 그 밈이 ’ 주‘가 되어버리는 순간, 그것과 배척되는 다른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과 자신의 사상, 신념을 동일시하게 되는 것이다. 집단정신이 활동하는 두 번째 방식인 정신적 유전자(meme)에 의해서, 밈의 숙주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정확히는 밈의 작용을 자기 자신의 주체적 생각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과 동일시된 밈(생각, 사상, 신념)등이 공격받으면 매우 화가 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밈은 개체의 정신을 지배하여 자신을 퍼뜨리게 유도한다. 이것이 진화심리학에서 말하는 ’ 집단정신‘이며, 이 집단정신은 개체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종의 생존과 번식에 가장 유리하다고 여겨지는 방식으로 그 종의 사고체계를 지배할 뿐이다. 예를 들어 인간이라는 종이 채택한 현대 물질문명 자본주의는 현시점에 가장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다고 여겨지는 meme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종의 보존에 유리하다고 여겨지는 밈이, 기원전 2천 년 경에는 ’ 신의 음성을 직접 듣는 방식’이었다. 그렇기에 그 시대의 인류는 양원화(2 분화)된 뇌를 통해 우반구로는 명령(신의 음성)을 내리고 좌반구로는 명령을 이행하는 생존 메커니즘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홍수와 같은 거대한 자연재해 이후,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신의 목소리를 듣는 다수의 사람보다, 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개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었던 소수의 돌연변이 들이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에서 더 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를 기준으로 인간의 생존 메커니즘은 변화한다. 우반구의 명령을 좌반구가 바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개체로써의 의식이 생겨 우반구의 명령을 좌반구가 비교, 판단해 보고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시기부터 인간에게 ‘나’라는 ‘개체의식’이 생기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의식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저 우반구의 명령(신의 음성)을 의문 없이 ai처럼 따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개체의식이 생기게 되자 점차로 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때부터 신에게 ‘닿기 위한’ 여러 방법들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제사들 지낸다거나 기도를 올린다거나 하는 것이 이에 속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인류는 신의 도움을 받아 생존해 왔다. 자연이라는 파괴적이고 압도적인 힘 앞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신이라는 생존 메커니즘에 의존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의존은 신이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된 상황에서도 이어진다.
예를 들어, 원시인 a 씨가 있다고 치자. 밖은 눈보라가 아주 매섭게 치는 곳이다. 집에는 먹을 게 없다. 아내와 자식들이 굶고 있다. 가장인 A 씨는 먹을 것을 구해와야 한다. 그러나 눈보라가 너무 심해 사냥감을 구하러 나가는 데에는 큰 위험이 따른다.
이런 상황에서 밖에 나가 먹을 것을 구해오는 것과 눈보라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중 어느 것이 생존할 확률이 더 높았을까? 눈보라가 언제 그칠지 모르기 때문에 재해가 지나가기를 하염없이 기다릴 수는 없다. 이때 두 부류의 사람이 나타난다. 하나는 자신이 눈보라 신의 자손이라고 여기고 눈보라의 신에게 기도를 한 뒤,
“비록 눈보라가 치지만 나는 눈보라의 신의 자손이기 때문에 괜찮다. 방금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고 왔으니, 이 눈보라 속에서도 나만은 식량을 찾아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하나는 “눈보라가 치고 있으니 그칠 때까지 집에서 기다리자”라고 하는 사람이다. 전자는 신에게 기도를 함으로써 눈보라가 치는 밖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었다. 후자는 그냥 집에 있는 사람이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누가 살아남고 누가 죽었을까?
본인이 실제로 눈보라의 신의 자식이든 아니든 그런 것과 상관없이, 용기를 얻어 밖에 나간 사람이 더 많이 살아남게 되었다. 우리는 그 눈보라의 신의 자손인 사람들의 자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존과 신에 대한 기도(주술적 사고)는 우리 뇌의 원시적인 수준에서 연결이 되어있다. 그러한 주술을 통해서 마음이 변하였고(변성의식) 용기를 얻어 한 발자국 내딛은 결과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탄생한 이래로, 우리 인간은 이렇게 살아온 시간이 더 길다. 이성과 합리를 통해 세상을 보게 된 것은 굉장히 근래의 일이다. 알기 쉽게 비유하면 이렇게 된다. 인간이라는 종이 지금까지 존재한 시간을 만년이라고 표현해 보자. 그중 저렇게 원시적인(주술적인) 방식으로 살아온 시간이 9999시간이다. 이성과 합리를 사용해 살아온 시간은 1시간 정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성과 합리를 중시하는 현대인이지만, 실제 우리의 뇌는 원시적인 방식으로 작동하기가 더 쉬운 것이다.
그래서 내가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원시적인 방식(주술적 방식)에 기대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갑자기 큰돈이 필요하다던지, 헤어진 연인이 돌아왔으면 좋겠다던지 할대, 점을 치고 타로를 보러 다니고 재회콘텐츠에 수백 수천만 원을 쓰게 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정보소스: 네이버 카페 유교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