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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 이름은 초록 Dec 19. 2022

나는 내 전공이 많이 아프다.

아무튼, 외국어를 읽고 

고백하자면 내게는 '외국어 3개월 정보만 배워보기'라는 취미 생활이 있다. 심지어 전혀 모르는 말인데 독학을 하기도 한다. 책 한권을 사다가 무작정 들여다보거나 오가는 출퇴근길에 괜히 들어보고 마는 식이다. 외국어 3개월이라는 것은 바이엘 상권의 반절 정도의 진도에서 그만두는 것과도 비슷하다. -중략-           관심은 많지만 열심히 하지 않는 이 꾸준함은 또 뭘까 싶지만, 습관적인 게으름 속에서도 꽤 오랫동안 이어지는 이 집요한 미련에 대해서, 이제라도 인정을 해보자는 차원에서, 용도를 알 수 없는 책을 쓴다. 미지의 외국어가, 이 모르는 말들이 어째서 나를 매혹시켰는지, 혹은 그 매혹이 문득문득 어떻게 다시 일상에서 발현되곤 하는지를 더듬게 될 것 같다. (p.9~11)

불어를 전공했으나 스스로 전공이라는 말을 붙이기엔 어쩐지 어색해하는 저자는, 세상 재미없을 것 같은 스토리의 독일 소설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를 읽고 복잡하고 깊고 진지한 것들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들의 매력을 느껴보고 싶어 독일어를 독학한다. 대학에서 A학점 폭격기를 맞으러 스페인어에도 잠시 빠졌으며, 기무라 타쿠야의 나래이션은 저자를 일본어로, 와호장룡과 뜻밖의 출장으로 중국어 공부도 시도한다. 


그래도 언어 전공을 원했고 여러 언어에 대한 관심으로 '기초00'까지 공부한 저자의 경험담이 '혹시 나는 언어적 재능을 타고 난게 아닐까?' 생각했던 나의 10~20대를 생각나게 했다. 



외국어, 특히 영어는 내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 같은 것이다. 

존재도 모르고 살았던 아빠에게 갑자기 보내졌던 9살~11살 사이, 관심 밖의 혼외 자식인 나와 달리 나와 동갑인 2명의 사촌들은 당시에도 조기 영어교육을 받아 명절이면 유창한 외국어 솜씨를 뽐내곤 했었다. 그때마다 나는 주눅이 들어 나도 저 언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싶다 생각했었다. 학원은 아무도 보내줄 생각이 없었지만 길에 붙은 포스터, 달력에 새겨진 영어 문장등을 혼자 노려보며 'a'가 'ㅏ'발음이구나 등을 깨닳았을때의 희열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후 다시 엄마에게 맡겨진 나는, 혼자 단칸방에서 일나간 엄마를 기다기던 긴긴 방학에 EBS의 영어 프로를 들으며 들리는 대로 한글로 옮겨쓰며 영어를 독학 했다. 당시 11살~12살이었던 것 같은데 그 독학의 힘이 대단했는지, 웃기는건 5~6학년 땐 영어 말하기 대회에 나가기도 했다는 거다. 

  

고등학교 영어 시간, 교과서를 읽고 돌아가며 독해를 하는 전형적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의 독해를 들으신 영어 선생님께서

"연주는 꼭 영문과 가라. 그랬으면 좋겠다." 그 말씀은 영영 미궁속 같았던 나의 재능을 '영어'라고 확인 받는 순간이었다. 어찌어찌 공부해서 대학 합격장을 3개의 학교에서 받게 되었는데, 확인된 재능은 왠지 이미 내것인것 같아 전혀 전공으로 고려하지 않게 된다.  H대는 간당간당한 점수라 과를 낮춰서, 다른 두군데는 넉넉한 점수라 경영학부에 넣었고 나는 H대를 선택했다. 입학은 H대 생활과학부. 초중고 12년간 단 한번도 생각하지 않은 학부였다. 그 중 '소비자학과'를 가야지 라고 생각했으나, 학교가 아닌 '동아리'를 다닌 관계로 1학년 때 학사경고를 받아 미달인 '식품영양학과' 학생이 되었다. 

어찌하여 나는 전과도 복수전공도 고려하지 않은 채 졸업을 해버렸는지.. 1도 관심없던 분야를 3년이나 전공이라고 몸 담고 있으며 다른 길은 어찌 전혀 고려하지 않았는지 아직도 스스로가 원망스럽긴 하다. 


웃긴건 간신히 턱걸이로 영양사 면허를 따고, 영양사로 첫 사회생활을 하고, 그 원망스러운 전공 덕에 가고 싶던 회사에 입사도 하게 된다. 어찌보면 그저 운명이라고 밖엔 설명할 수 없는 순환인 것 같다. 


그래도 모로 가도 서울엔 왔으나, 어떻게 왔냐 묻는 질문엔 여전히 얼굴이 뻘개진다. 전공이 뭐냐는 질문은 몸무게를 묻는 것 보다 더 싫었다.  내 재능 '영어'를 외면한 댓가를 치르는 것 같아 취업후 나도 외국어 주변을 어슬렁 대곤 했다. 



저자가 다닌 이름마저 로맨틱한 '알리앙스 프랑세즈'를 나도 다녔었다. 옆자리 '사과'라고 자신을 소개한 말간 얼굴의 친구는 미대 유학을 위해 프랑스어 공부를 한다고 했다. 저자처럼 나도 이루지 못한 첫사랑 마냥 3개월 등록 후 3번 정도 출석, 출장 가서 체류에 필요한 기본 관광객 프랑스어 정도를 구사하게 되었다. 


중국어와 일본어도 마찬가지. 읽고 말할 수 있으나 쓸 수 없는 슬픔을 중국어에서, 듣고 말할 수 있으나 쓰고 읽을 수 없는 까막눈의 슬픔은 일본어에서 느꼈다. 물론 이 또한 기초OO어 언저리에서 였다. 


영어의 경우, 안해서 그렇지 하면 난리난다  생각하며 비장의 무기마냥 늘 가슴에 품고 살았다. 난리는 싫었는지, 그 또한 나의 재능이 아님을 마주하기 두려웠는지는 모르겠다. 깊이 다가서지도 맘 먹고제대로 해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징한 미련은 계속 남아 서른이 되던 해엔 방송통신대 영문과 3학년에 편입까지 했다. 그러나 영어'영문'학과는 영어학과가 아님을 그제사 깨닳고 3학년 마치고 휴학을 했다. 이루지 못한 짝사랑 같은 존재.. 후훗.. 



각 언어를 습득하며 느낀점, 여행과 드라마등으로 해당 언어와 문화에 대한 경험담은 친구와의 수다처럼 부담없고 재미있다. 뜬금없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독일어가 배우고 싶어졌다. 또 한번의 짝사랑을 향한 불나방 같은 나의 본능에 불이 지펴진 것 같았다. 독일어가 배우고 싶어진 이유는 저자가 쓴 독일어의 특징 때문이다. 



'독일=재미없음'이라는 인식은 새삼스럽지도 않았지만, 라디오에서 <맨허튼의 선신>(→저자가 대학시절 연극반에서 공연한 작품, 라디오 드라마가 원작, 대체 무슨 재미인지 모를 줄거리)을 듣고 동네 술집에라도 모여 "어제 라디오 들었어?" 하면서 드라마 얘기를 나눴을 옛날 독일 사람들을 생각해보니 이상한 흥미가 돋았다. 진지함을 재미로 소비 할 수 있는 성향이랄까, 문화랄까 그런 국가적(?)특징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궁금했다. 어렵고 복잡하고 깊고 진지한 것들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들 같았다.   -중략-                  그런데도 독일어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쓸모없는 진중함, 효용을 바라보지 않는 진실함 같은 것, 1+1=2처럼 딱 떨어지는 에누리 없는 말들의 매력을 느껴보고 싶었다. (p.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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