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
역시, 집을 찾을 때는 0방과 00방이지. 뚜벅이었기에 직장과 가까운 동네부터 살피기로 했다. 군대 전역 후 땡전 한 푼이 없던 터라, 전세는 무리여서 월세와 보증금이 합리적인 곳부터 몇 곳을 추렸다. 썩어도 준치라고 했던가 돈을 더 주더라도 원룸은 풀옵션이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미리 전화를 하고 방문 시간을 잡았다. 목소리로도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는 걸까. 유재석 씨처럼 탑100귀는 아니지만 사람 목소리를 듣고 바로 선입견을 가져버리는 나의 이상한 감에 따라 몇 군데를 걸렀다. 그리고 탐방에 나섰다.
역시는 역시였다. 분명히 사진으로 넓어 보였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름 장신(?)인 내가 누우면 가득 찰 것 같은 방이었다. 공간을 왜곡시키는 중개사님의 사진 실력에 감탄할 뿐이다. 낮인지 밤인지 모를 음습함, 쾌쾌한 냄새, 지나치게 화려한 벽지, 너무 좁은 화장실, 전 세입자가 살다 간 흔적, 오래된 보일러, 세탁기 인지 세균증식기인지 모를 오래된 세탁기, 복도에서 부터 나는 담배냄새... 완벽한 하모니였다.
결국, 마음에 드는 방을 건지지 못하고 직접 동네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외관이 깔끔하고 주변에 편의 시설이 있는 빌라부터 벽에 붙어있는 연락처로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중에 이름이 눈에 띄는 몇몇 빌라들이 있었다. 포x코, 아x파크, xk 빌라, 푸x지오. 브랜드 이름을 사용한 빌라들. 그만큼 좋다는 걸까, 우리에게 희망을 주려는 걸까. 아니면, 어디 가서 주소를 적을 때 어깨 펴고 당당하게 적을 수 있도록 한 집주인의 배려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 빌라로 인해 집주인이 그런 곳에 살게 되었다는 뜻일까. 괜한 자존심에 브랜드 이름을 쓰고 있는 빌라들은 모두 거르기로 했다.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 행복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빌라를 지나니 모퉁이에 있는 깔끔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을 벗어난 그곳이 딱 내 모습 같아서 그곳을 선택했다. 그래 이곳에서 난 부자가 될 거야. 너의 이름은 '리치빌'이었다.
이상한 계약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하는데, 호랑이보다 무서운 게 계약 체결하기 전 주인의 모습 아닐까. 원룸 계약 총 5회. 5전 1승 1무 3패를. 몇 가지만 돌이켜보자.
첫 번째 원룸 계약 1패. 공무원 공부를 하고 있던 친구가 우선이라 친구에게 전적으로 맡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두세 군데 돌아보고 집을 계약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친구가 처음 보러 간 집에서 바로 마음에 든다는 말을 해버린 것이다. 아, 그때 주인의 미소란. 정신을 차린 순간 나와 친구는 집주인의 차를 타고 사무실로 이동 중이었다. 사무실에 붙어 있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과 집주인이 내준 커피 한 잔에 취해 이미 친구는 계약서에 싸인을 완료해버렸다. 월세는 평균 시세랑 비슷했지만 나가기 전에 원상복구의 상태로 돌려놓을 것, 수도세 별도라는 특약사항이 붙었다. 처음엔 이 수도세 별도의 의미를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월세 + 전기세 + 가스비 + 수도세, 이상했다. 금액은 점점 커져만 갔고 여름에 피크를 찍었다. 수도세에 제대로 옷이 젖어버렸다. 나갈 때에도 집주인은 수도세 미납부한 부분이 있다며 우리에게 보증금 얼마를 깎겠다고 연락이 왔다.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수도세를 우리는 집주인에게 어떻게 말해야 했을까. 그리고 며칠 뒤 또 연락이 왔다. 집 청소가 제대로 안돼서 보증금을 더 깎겠다고. 아, 성인 남자 셋이서 수세미와 걸레로 팔이 빠져라 박박 청소를 해도 원상복구가 안 되는 것이구나. 그땐 왜 그랬을까. 20대 초반의 무지함이란, 그렇게 우린 이사할 때 버려지는 오래된 가구처럼 집을 떠났다.
두 번째 원룸 계약 1승. 친구들과의 동거를 끝내고 군대 가기 전까지 일 년 남짓의 기간 동안 혼자 살 집을 찾아야 했다. 첫 번째를 교훈 삼아 서너 군데를 돌아다니고 마음에 드는 빌라를 찾아 연락을 했다. 한 번 데여서 그런지 수도세는 월세에 포함되고 도시가스랑 전기세만 별도로 내야 한다는 것을 꼭 확인했다. 그리고 월세를 깎기 위한 협상에 돌입했다.
"저... 제가 돈이 돈이 좀 부담돼서 그러는데요, 1만원만 깎을 수 있을까요?"
평소에 이런 말을 잘하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매달 1만원 씩 누적되는 스노우볼을 겪어봤기에 용기를 냈다. 주인은 1만원만 깎아달라는 내 말에 안심을 했을까. 시원한 웃음으로 요구를 들어주셨다. 좀 더 깎아볼걸.
세 번째 원룸 계약 1패. 중개사 수수료도 아낄 겸 '주인 직거래'라는 말을 보고 연락을 했다. 주인아저씨는 본인이 공인중개사 자격증이 있으니까 직거래를 해도 된다고 말했다. 전세 계약이라 나름 금액도 크고 두려웠지만 경매로 넘어가도 시에서 방 한 칸에 2000만원을 보장해준다는 말을 듣고 덜컥 계약을 해버렸다. 부부 이름을 한 글자 씩 따서 건물 이름을 지었다는 집주인의 말에 약간의 신뢰가 생겼달까. 하여튼 이놈의 주관적인 삘이 문제다. 사는 동안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나가기 3개월 전에 미리 주인에게 말했으나 나보고 다음 세입자를 구하고 가라신다. 급한 건 난데 별 수 있겠나. 00방에 내 방 사진을 여느 중개사님들이 하듯이 마법의 각도로 찍어 올렸다. 2주가 지나도 연락이 없자 초조함이 극도로 달했을 때 2명에게 연락이 왔다. 후보자1, 후보자2로 번호를 저장하고 마치 내가 공인중개사가 된 것처럼 일정을 잡고 집 구경을 시켜줬다. 방탈출을 위해 감언이설을 하고 "계약할게요."라는 세입자의 말을 이끌어낸 다음 주인에게 연락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집주인이 해야 할 건데 을보다 못한 병이었던 내가 제대로 갑질을 당했던 것이다.
계약서의 작은 글씨들은 왜 항상 계약을 하고 나서야 제대로 보이는 걸까. 임차인이라서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는 불쌍한 빌라인생들이 나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알고 위로를 얻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