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버킷리스트 37 - 2월 토지 문학기행 다녀오기.
하동 평사리 언덕배기 위에는 지리산 자락 아래 섬진강이 흐르고, 물감을 풀어놓은 듯 너른 악양평야를 바라보고 서 있는 박경리 작가의 작은 동상이 있다.
박경리 문학관의 하얀 장지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슴이 쿵 내려앉는 세로 쓰기의 글 하나.
‘ 그래, 글기둥 하나 붙들고 여까지 왔네 ’
작년 10월부터 <스무 권 스무 달 토지 읽기>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75명의 토지메이트 중, 35명의 메이트가 윗지방팀과 아랫지방팀으로 나뉘어 각각 빨강버스와 노랑버스를 타고 달려왔다. 25년 세월을 글감옥에 갇혀, 보이지 않는 작은 것들에서부터 인간 삶의 생명을 품은 너른 토지 위에 흔들리지 않는 글기둥을 깊이 뿌리내리신 고단한 선생님의 삶이 우리의 발걸음 또한 ‘여까지’ 이끌어 주셨다.
혼자라면 눈을 가린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한 길로만 내달렸을 빠르고 심심한 길이었다. 우리가 모여 나만 알고 있던 지름길과 둘레길, 골목길과 샛길을 서로에게 안내해 주고, 함께 걸어보며 외따로 떨어진 줄만 알았던 그 길을 거미줄처럼 촘촘히 이어 내고 천천히 걷다 아침이슬이 총총히 매달린 그 빛나는 광경을 함께 보는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세우신 글기둥 위에 그녀들이 글그늘을 만들어주었고 나는 모처럼만에 꼭 닫은 문을 활짝 열어 선선한 바람과 반짝이는 햇살을 들였다. 눈에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숨 쉬는 것, 매 순간 모든 것이 좋았다.
수레바퀴 모양의 인물 관계도가 굴러가며 이야기가 펼쳐진다. 작가의 이야기 속에는 누구 하나 슬쩍 빠지거나, 모퉁이 그림자에 가려지는 이가 없다. 균등한 무게로 땅을 밟고 지나가는 수레바퀴처럼 누구 하나 주인공 아닌 이가 없다. 우리의 삶 속에 누구 하나 주인공 아닌 이가 없듯이.
육신에 속아서 사람은 죽는다꼬 생각하는 기라요. 불쌍한 인생들, 나는 죽는 기이 아입니다. 가는 기라요.
육신을 헌 옷같이 벗어 부리믄 그만인데, 내사 마, 헐헐 날아서 가는 기라요.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 기라요.
거기 가믄 양반도 없고 상놈도 없고 부재도 없고 빈자도 없고 불쌍한 과부도 없고 홀애비도 없고
부모 읽은 자석도 없고 자석 읽은 부모도 없고 왜놈도 조선놈도 없고......
그랬이믄 얼매나 좋겄소? 그라믄 나는 콧노래나 브르믄서 집이나 지을라누마요.
토지 5권 p.213
윤보의 마지막 말처럼 사람의 삶과 죽음도 시작과 끝이 아니라, 육신을 입고 벗는 일상적인 원운동이라는 것이 인물관계도와 오버랩되며 다가온다.
박경리 문학관을 지나, 1부 5권을 읽으며 마음에 익은 평사리 사람들의 집들이 드라마 토지 세트장에 펼쳐졌다.
솜옷 입은 아이들같이 오묵하고 따스하게 이엉을 갈아 씌운 황금빛 초가지붕이 꼬막조개 모양으로 옹기종기 모여 앉은 마을은 이제 평화스럽고 한가한 겨울을 맞이한 것이다.
토지 1권 p.86
아름다운 평사리의 전경을 모두 담은 두만네 집에서 우리 모두 탄성을 질렀다. 외따로 떨어져 고래등을 뽐내고 있는 맥시멀리스트 최참판댁 보다도, 깔끔한 세간에 자연을 두루품은 두만네 집이 미니멀 라이프를 꿈꾸는 내 마음속에 쏙 들어왔다. 성실하고 묵묵하게 제 가족을 돌보고 살림을 일구던 이평과 가난한 이웃을 살뜰하게 보살피고 품어주던 두만네의 모습이 이 집의 구석구석에 담겨있었다.
이번 문학 기행에서 내게 가장 빛나는 순간은 토지메이트와 함께 한 밤마실이었다.
줌을 통해 간간히 얼굴을 보아오긴 했지만 오프라인으로는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는데, 누구랄 것도 없이 빨강머리 앤과 다이애나처럼 알코올도 없이? 마음을 열고 이야기했다.
행복은 인스타를 보듯 젊고 날씬한 몸매와 수려한 외모로 남편과 오붓하게 호캉스를 다녀오거나, 온 가족을 거나리고 비행기 타고 가야 나오는 풀빌라에 입성해야 오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영리한 여자들은 나이가 들어도 서로 동행하고 연대하며 재밌게 사는 법을 잘 찾아다닌다. 외려 젊었을 때는 전혀 몰랐던 다른 방식의 행복이다. 여자로 태어나서 너무너무 행복하다. 남자들이 왜 이렇게 불쌍해지지.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