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번개모임

춤. 소리. 어울림 <토지> -국립극장 달오름

by 레아


요즘 불경에 빠져있다지만, 본색은 천주교신자인데 이번 생일선물로 불상을 선물 받게 되어 몹시 당황스럽기도 하고 그지없이 재미있기도 했다. 선물을 준 후배는 내가 곧 개종할 것 같다나? 푸흐흡. 문득 내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성경, 불경, 혜경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8년 전부터 나를 나 자신에게로 되돌려주신 요가의 공혜경 선생님과 <토지>를 읽으며 가시 돋친 경계를 풀고 마음을 여는 법과 연민을 가르쳐주신 토지의 김혜경 선생님. 두 선생님은 마치 사찰의 일주문처럼 내 앞에 서계신다. 일주문이 사찰의 경계를 알리고 신성한 공간으로 안내하듯, 두 혜경선생님의 가르침은 삶의 찌들음으로 내 안에서 겹겹이 흑화 된 스텔스 모드의 흑염룡을 무장해제시켜 순수한 내 안으로 걸어 들어오게 한다.


춤. 소리. 어울림으로 본 무대는 <토지>를 글로만 읽은 나에게 마치 키스를 글로 배우고 처음 해본 것처럼 (마지막이 언제였지?) , 간이 없는 이유식만 먹다 처음 초콜릿을 맛보고 천국을 본듯한 아들의 표정처럼, 폭군의 셰프에서 연지영의 음식을 먹고 황홀해하는 연희군처럼 다가왔다. 종이 위의 글들이 판소리와 어우러져 무용수들의 즈려밟듯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디딤발로, 선이 다른 손끝이 그려내는 가지가지의 포물선으로 표현되어 각기 다른 감정과 선율을 보여준다는 게 찬란했다. 예술은 잘 모르지만 드라마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토카타와 푸가급 클라이맥스랄까?


그 시절, 봉순과 환이.

글 속에서는 각기 다른 챕터로 소개되었지만 무대에서는 각기 다른 아픔을 토해내며 한 무대로 표현한 공간이 번민은 다르나 이어진 생이고, 이어갈 생임을 표현하는 듯했다. 함께 소개된 박경리 작가의 시가 판소리로 표현되는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아아! 판소리. 대체 너는 누구냐?

시라는 장르는 원래 즐겨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그래도 꼽으라면 엄마걱정의 기형도나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는 윤동주 정도지, 원래 시로 시작했다가 소설로 전향한 작가들의 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상한 취향으로 (하지만 운문인 듯 산문인 문장 속 그분들의 깊이와 아름다움은 몹시 사랑합니다.)

박경리 작가의 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변명을 구구 절절히 해본다. (앗! 찔려.)


하지만 판소리로 전해진 박경리 작가의 시 <삶>과 <민들레>는 애초에 취향이고 나발이고 그냥 변명에 불과했다는 것임을 깨달았다. 점과 선의 납작한 2차원에서 종이 밖으로 튀어나와 시간 위를 흐르며 숨을 쉬고, 깊은 한을 내뱉듯 소리와 몸짓으로 표현되는 3차원의 입체감과 시간을 초월한 공감이 담긴 판소리는 매력을 넘어 마력이 느껴졌다. 사랑이 시작될 때처럼,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처럼, 판소리의 한 대목으로 내 안에 시가 이렇게 파고들 줄은.



삶 - 박경리


대개 소쩍새는 밤에 울고

뻐꾸기는 낮에 우는 것 같다


풀 뽑는 언덕에

노오란 고들빼기꽃 파고드는

벌 한 마리


애닯게 우는 소쩍새야

한가롭게 우는 뻐꾸기

모두 한 목숨인 것을


미친 듯 꿀 찾는 벌아

간지럽다는 고들빼기꽃

모두 한 목숨인 것을


달 지고 해 뜨고

비 오고 바람 불고

우리 모두 함께 사는 곳


허허롭지만 따뜻하구나

슬픔도 기쁨도

왜 이리 찬란한가


공연 뒤풀이에서 선생님들과 이야기 한 여러 꼭지들 중 뻐꾸기( 조준구, 홍 씨, 김두수, 임이네, 조용하, 홍성숙, 양을례)가 어떻게 소쩍새(용이, 월선이, 봉순이, 관수, 강쇠, 석이네, 석이)와 같이 찬란한 가? 왜 나는 잘생긴 까뮈가 도끼를 들고 부조리 속에서도 시시포스의 삶을 살아야 한다며 꽝꽝 얼은 나의 바다를 깨뜨려도,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 떼시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설하시며 모든 중생 너나없이 고귀하다 알려주셔도 나쁜 놈은 싫기만 한가? 뻐꾸기 놈이 미워죽겠는가?라는 질문에 인간의 눈에는 소쩍새의 둥지에 몰래 자기 알을 낳아버리고 태어나자마자 소쩍새의 새끼들을 둥지로 밀어죽이는 행동이 ‘나쁜 놈’ 같지만, 자연에서는 본능적인 생존전략일 뿐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 나쁜 놈‘ 도 결국은 자기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존재인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뻐꾸기든 소쩍새든 심지어 인간 세계에서 ’ 나쁜 놈‘처럼 보이는 존재라도, 자기 삶을 살아내는 순간 자체가 찬란하다라고. 아! 그래도 난 여전히 나쁜 놈은 싫은데... 안 찬란한데...ㅋㅋㅋ



민들레 - 박경리


돌팍 사이

시멘트로 꽉 꽉 메운 곳

바늘구멍이라도 있었던가

돌바닥에 엎드려서

노오랗게 핀 민들레꽃

씨앗 날리기 위해

험난한 노정(路程)

아아 너는 피었구나


아빠는 내 생일에 없는 살림치고는 엄청난 크기의 꽃바구니를 보내주시는데, 먹지도 못할 꽃을, 내일이면 시들어 버릴 꽃을, 종량제 쓰레기봉투에 다 들어가지도 않는 바구니를 버리기도 힘들다며 그만 보내시라고 오만짜증을 부려도 매년 보내주신다. 나를 똑 닮은 자식을 낳아 키워보면 안다는 놀림인 듯 저주 같은 말이 들리는 가운데, ‘아! 말이 씨가 되는구나,를 느끼며, 정말이지 말조심을 해야 한다는 다짐을 한다. 공연을 보고 돌아와 침대맡에 있는 아빠의 꽃바구니를 보는데, 문득 아빠의 뜻이 아프고 애틋하게 헤아려진다.


딸아. 너는 피었구나. 누가 뭐래도 찬란하고 아름답게 피어난 오늘의 너를 축하한단다.


으흐흑 아버지이~!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