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서 연극하는 이야기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일주일에 한 번씩 고등학교에 나가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다.
작년에는 아동문학, 일러스트레이터로 미술시간에 들어갔는데, 올해는 연극반이 신설되어서 연극수업에 들어간다.
학생들을 한 시간 만나기 위해서는 아주 복잡한 일들을 많이 처리해야 하는데 - 수업계획서를 올리고 수업이 끝난 후엔 보고서를 써야하며 함께 활동하는 다른 예술가들과 회의를 열 번 하고 담당 선생님은 수업 일정 조율하고 행정실에 급식 신청해주시고 등등등등등 - 게다가 이사한 집에서는 출퇴근 왕복 여섯 시간이 걸린다 - 이 모든 험난한 과정은 학생들을 만나는 한 시간 동안 눈 녹듯이 사라진다.
고등학교 나이의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참으로 신기하다 느끼는 것은, 같은 나이인데도 어떤 사람은 아직도 애기같고 어떤 사람은 벌써 내 또래 친구처럼 어른스럽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봄을 연상시킨다. 봄은 누군가에겐 아직 너무 춥고,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벌써 너무 덥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서 연극 수업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 어떤 내용을 할지 고민과 공부를 많이 했다.
자기소개 부터 우린 특별하게 하자,해서 '가짜 자기소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내가 아닌 다른 것으로 나를 소개하는 것으로 학생들이 자신을 어디에 비유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심리를 조금 엿보는 데 도움이 된다. 인상에 남은 것은 바람개비 - 바람에 휘둘린다 / 쓰레기통 - 얻어 맞는다, 아주 세게 맞는다 / 고무줄 - 아무리 늘려도 되돌아가는 게 바보같다 / 나무 - 봄이 되어서 몸이 아프다 등 부정적인 표현에 자신을 비유하는 학생이 절반 정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나보다 작고 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나에게 대입하여 생각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과 가장 슬펐던 순간에 대해 익명으로 글쓰기를 하고 랜덤으로 읽기를 했는데, 여기서도 학생들은 솔직한 마음을 잘 적어주었다. 아이들이 적은 가장 슬펐던 순간에 대해서 나는 아주 잘 공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굉장히 힘든 사춘기를 보냈고 그 시절은 항상 외롭고 쓸쓸하였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 수학시간이었다. 그때 나는 은희경, 공지영, 기형도 등 한국 문학에 심취하여 공부를 - 원래도 안 했지만 - 하지 않았다. 수학시간에 책상 아래 소설책을 놓고 몰래 보고 있었다. 수학 선생님이 다가왔을 때 나는 말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 문제를 푸는 것보다 이 책을 계속 읽는 게 더 중요해요.
그때 수학선생님은 그래, 라고만 했다.
근의 공식도 모르는 채로 고2가 된 아이를 회생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처음으로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느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이해받았다는 기분. 고등학교 시절을 통틀어 처음으로 느끼는 기분이었다.
학교란 그런 곳이어야 한다. 학교는 다음 사회에 나갔을 때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되더라도 잘 살 수 있는 예행연습을 하는 곳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에서 모르는 친구와 인사해보고, 친한 친구와 싸우고 화해해보고, 양보도 해보고 희생도 해보고 도움도 받아보아야 한다. 연애도 해보고, 차이기도 하고, 열심히 공부한 만큼 성적이 안 나오는 경험해봐야 하고,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반발해봐야 하고, 기쁘고 재밌는 것을 공유하고 속상한 일을 위로 받아봐야 한다. 학교라는 안전한 공간 안에서 우리는 앞으로 세상에서 겪을 수많은 일들에 대해 미리 연습해봐야 한다. 학교란 그런 곳이어야 한다. 그래서 학교에서 연극도 하고 미술도 하는 것이다.
학생들의 가장 슬펐던 순간에는 학업 스트레스, 누군가의 죽음, 헤어짐, 친구 관계의 힘듬 등이 있었지만 압도적으로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았다. 대학가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국영수만 열두시간씩 하면 된다 - 실제로 이러한 이유로 자퇴를 하는 학생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 하지만 학교는 그런 곳이 아니다.
예술 교육을 할 때 나는 항상, '예술이란 일상의 비밀 통로를 만드는 일'이라고 표현한다.
우울하고 불안하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던 사춘기 시절을 함께 보내준 은희경 작가의 책 한권, 그 비밀 통로가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
전인교육으로서의 연극 교육을 바라보는 관점의 논문을 읽었는데 거기서도 일단 좋은 감상자로 길러내는 것이 연극 교육의 시작이라고 표현하였다.
좋은 감상자가 많아진다는 것은, 좋은 세상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이다.
흥행하는 베스트셀러만 팔리는 세상이 아닌, 1위하는 영화만 보는 세상이 아닌, 다양한 새로운 관점의 작품이 공존하는 세상.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가졌는지, 몸이 불편한지 아닌지, 결혼을 했든 이혼을 했든 안 할 것이든, 고양이를 키우든지 강아지를 키우든지, 내가 누구든지 간에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점점 더 좋은 세상이 된다면, 우리는 입시에 찌들어 고통받는 공교육을 조금이라도 바꿔볼 수 있겠지. 십 억이 넘는 말도 안되는 부동산 시장도 조금은 바꿔볼 수 있겠지. 수많은 세상의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조금씩 바꿔볼 수 있겠지. 이 모든 일이 고등학교 2학년 교실에서 매주 화요일 3교시와 6교시 연극 수업시간에 시작된다. 열 여덟 살 아이들이 어색한 걸음으로 걷고, 부끄러워하며 쑥스럽게 대사를 읽는 순간부터. 모든 것은 아주 작은 순간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