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타는 내가 이상하지요
3월 말, 십 여년 만에 만난 친구와 과도하게 술을 마시고 지독한 숙취로 며칠을 고생한 후 술이 덜 깬 채로 시작한 4월은 몇 건의 온오프라인 미팅, 손님들 방문, 두 권의 교정지, 신간 출간, 집 단열 공사, 야옹님의 병환, 번아웃 등 너무 많은 일들로 채워졌다.
그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업무 단톡방에 봄이 싫어요, 라고 썼다. 누군가 봄을 타시는군요, 라고 해서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나는 봄을 타는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모두 겨울이 지나고 꽃구경을 하고 놀러다니는데 나는 점점 마음이 쓸쓸해지고 고독해진다.
심심하다는 생각이 평소에 전혀 들지 않는데, 요새는 이상하게 심심하다. 뭔가를 하고 있어도 집중이 잘 안 되고 책도 영화도 노력해서 봐야한다. 일이 그동안 너무 많아서 번아웃이 온 것 같아, 작정하고 며칠을 아무 것도 안하고 누워만 있기도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새로운 대화를 나누어도 그 순간은 즐거울 뿐 근본적인 문제같은 쓸쓸함이 해소되지 않는다. 양양 바다도, 주문진 생선구이도 그것을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봄은 겨울과는 다르다.
그것은 오늘부터 봄, 이라고 지칭할 만한 정확한 느낌이 없다는 것이다. 봄이란 것은 마치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불행이나 작은 행복처럼 은은하게 깔려있다.
일 년 중 가장 힘든 것은 3월이다.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것 같지만 계절은 아직도 변하지 않는다. 겨울옷과 전기장판, 두꺼운 겨울 이불은 한두 번쯤, 아니 두세 번쯤 들어갔다가 나오게 된다. 대체 이 짓을 몇 번을 반복해야 하지? 봄이란 계절은 왜 계속 날 기다리게 만들지? 감자 싹은 언제까지 땅 속에서 기다려야 하는지 어떻게 알고 있지?
이런 생각은 매년 반복된다. 그래서 봄이 되면 소소하게 행복하다고 느끼거나 우울하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계절은 기억을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그 추웠던 겨울의 지하 작업실의 그 겨울의 느낌. 친구 집에서 작은 전기난로를 켜고 귤을 까먹으며 캐럴을 들을 때의 그 겨울. 어떻게 그 시간을 지나왔는지 기억할 수 없는 무력한 산골의 겨울. 뜨거운 여름 태양이 한밤중까지 열기를 남겨둔 열대야의 밤. 가장 뜨거운 시간에 햇빛을 받으며 울며 걷던 중랑천. 불타듯이 벌겋게 마당을 물들이던 감나무와 낙엽. 아직 채 눈이 녹지도 않았는데 혼자 잘났다며 핀 달빛 같은 목련이 가득했던 연희동 마당.
기억이 또렷하다는 것은 안 좋다. 언제나 그 계절이 되면 그 어디에선가의 그 느낌이 몰려와 조금씩은 외롭고 우울하게 만든다.
겨울 이불을 너댓 번에 걸쳐 빨고, 겨울 옷들을 빨래방에 들고 가서 빨아오고, 창틀과 선반까지 모두 닦아내고, 선풍기를 꺼내 닦고, 커튼을 바꾸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아, 이제 봄 끝이다. 봄 끝!
철마다 해야 하는 일들 중에 봄맞이가 유독 이렇게 싫다. 왜 겨울이 간 거지? 언제 간 거야? 말도 없이 가버렸잖아! 하는 생각이 들어 봄이란 것이 약삭빠르고 치사한 놈 같다. 봄은 그렇게 얄밉다.
봄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라고 선생님이 물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으로 나는 곤란해졌다.
시골집에 살면서 느꼈던 것은 농사는 바로 봄이라는 점이다. 뒷집의 목포 아주머니는 말했다. 올해는 깨나 많이 할 거야. 농사는 30년을 짓는다면 30번을 짓는 것이다. 나에게 남은 봄 동안에는 무엇을 심고, 무엇을 해야 할까.
어느 심리학자의 말에 따르면 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지역의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과거 지향적’이라고 한다. 항상 춥거나 항상 더운 지역의 ‘미래 지향적’인 성향에 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전적으로 이 의견에 동의한다.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 살고 있자면 항상 어떤 것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는 감정 상태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어느 계절로건 변하는 과정은 나에게 작은 상실감을 준다.
내 생각에는 오늘부터 겨울인 것 같아,라고 친구가 말했다. 나는 내 생각에는 어제부터 시작인 것 같았는데 오늘이 맞는 것 같아,라고 대답했다. 오늘부터 겨울이야.
이 이야기를 나눈 친구는 기억하는지 모르지만, 그때부터 나는 어떤 계절의 시작하는 날을 찾는다. 오늘부터 봄이라고 하자, 오늘부터 여름이라고 하자.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은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기억하고 싶은 계절의 어느 날, 그 겨울이 시작한다고 말한 그 날 같은 것 말이다.
신간에 작가 소개 글을 새로 썼다.
"첫째 조카가 태어나면서 그림책을 만들기 시작했고, 동화책 몇 편을 쓰고 그렸습니다. 이제 그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어서 저도 청소년 책을 씁니다. 누군가에게는 아직 추운 봄이 누군가에게는 벌써 너무 더운 봄일지라도 결국 모두는 여름을 맞이하듯이, 각자의 속도로 자신만의 마음으로 청소년 시절을 보내고 나면 결국 모두는 어른이 될 것입니다. 그 시간을 기다리는 시절에 한 줄이라도 위안이 될 수 있는 책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고보니 첫 연출한 연극의 마지막 대사도 봄이다.
"이제 정말 봄이네."
"응, 봄이야."
배우들은 매 공연마다 너무나 멋지게 이 대사를 발화하였지만 나는 항상 이 마지막 대사가 너무나 쓸쓸했다.
나에게 봄은 외로움과 쓸쓸함을 느끼게 하는 근본적인 작업의 원천인 모양이다.
이렇게 봄을 처절히 보내는 와중에도 남은 업무를 처리해야하기에 꾹 참고 일을 하다가 어깨가 완전히 돌처럼 굳어버렸다.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통증이 심각해져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고상한 표정으로 시원하다, 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아프다고 꽥꽥 소리를 질렀다. 원장님은 겨울동안 몸이 너무 웅크려서 그래요, 라고 했다. 남은 봄 동안 마사지를 몇 번 더 받을 것이다. 그러고나면 봄이 끝나겠지. 어서 가렴, 그리고 내년에도 다시 꼭 오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