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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늘바람 Oct 03. 2019

성수동과 나

재개발 이전의 성수동에 대한 기억

  나는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국민학교였던 시절에 성수 국민학교를 5학년까지 다녔으니 만 십 일 년을 살았던 동네이다.


  대략적으로 생각이 나는 것들은 이렇다.

  우리 집, 성수 아파트 3동 203호. 우리 집 앞은 바로 놀이터가 있었다. 놀이터에는 미로가 있었다. 미로는 직선으로도, 곡선으로도 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미로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뛰어노는 목적으로 만들었겠지만 실제 우리는 그 위를 뛰어다니면서 놀았다. 가장 높은 곳은 2미터가 넘었던 듯하다. 다른 곳은 1미터가량 되었고, 오른편에는 작은 원통형 공간이 있었는데 항상 오줌 냄새가 났다. 놀이터 안에서 사용되는 간이 화장실 정도로 이용했던 것 같다. 간간이 주먹만 한 돌도 섞여있는 모래밭인 데다가 폭은 20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단단한 시멘트로 된 구조물 위를 날 듯이 뛰어다녔으니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놀이였다. 우리는 건너뛰기라고 불렀다. 떨어져서 팔이 부러진 아이도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미로 건너뛰기를 하다가 다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왜냐면 그만큼 위험한 놀이가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정글짐은 쇠파이프를 엮어 색색깔의 페인트로 칠해놓았는데, 피라미드식으로 점점 올라가면서 높아지는 구조였다. 그곳에서도 술래를 피해 재빨리 가장 높은 칸으로 올라가야 하는 놀이이다. 만약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쇠파이프를 정통으로 맞을 수밖에 없는 구조물이었으니 그곳에서도 충분히 팔이나 다리나 이가 부러지기 좋은 조건이었다.


  등나무가 단 한 줄기 햇빛도 허락하지 않을 만큼 빽빽하게 들어찬 벤치도 있었다. 반원형으로 되어서 죽 둘러앉으면 열 명도 넘게 앉을 수 있는 벤치였는데, 그곳에서도 우리는 놀이를 만들어냈다. 한 사람의 술래가 손바닥으로 의자를 죽 훑고 지나가는 동안 다른 아이들은 술래의 손에 닿지 않게, 건너뛰거나 납작 엎드리거나 등나무 가지에 매달리거나 하였다. 등나무 외에도 수 십 년이 된 플라타너스가 가득했던 놀이터에는 송충이 같은 것은 아이들 숫자만큼 많았다. 그네나 철봉 아래 모래를 파면 오백 원짜리, 백 원짜리 동전을 주울 수 있었다. 그 동전으로 바로 옆 성수 슈퍼로 가서 과자나 사탕 같은 것들을 사 먹곤 했다.


  성수 슈퍼가 있는 건물은 2층짜리 상가 건물로, 슈퍼 외에도 2층엔 화실, 피아노 학원, 주산학원, 1층엔 닭집, 문구점, 화장품 가게, 미용실 등이 있었다. 나는 성수 슈퍼 건물 2층의 성수 화실을 아주 좋아해서 오랫동안 다녔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스케치북에 거의 티가 나지 않는 옅은 노란색으로 새나 호랑이 같은 밑그림을 그려주었고 우리는 그 위에 색깔을 칠했다. 스케치북을 똑같은 크기의 정사각형으로 줄을 그어 나누고 그 안에 원하는 모양이나 색깔로 꾸미는 구성 수업도 재밌었다.


  성수 슈퍼 건물의 맞은편에는 송약국이 있다. 우리 일가친척이 신뢰해 마지않는 약사 할아버지가 아직도 그 자리에서 그대로 약국을 하신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에 보았던 사람들은 내 느낌에는 아주 늙어버린 것 같지만 어른이 되고 보니 십 년, 이십 년의 시간은 어린 시절에 느꼈던 것보다는 별 거 아니다.


  우리 집 성수 아파트 3동 203호에서는 넷째 이모 가족과 함께 살았다. 어떤 이유에서 함께 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억하는 시간이 바로 그 시간이다. 아마 네 살쯤 되었을 때일까. 한 방에서 엄마와 나와 언니가 잤던 것 같다. 조용필 아저씨가 티비에서 서울서울서울을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넷째 이모네는 5동으로 이사를 갔다. 이모부가 어디선가 리어카를 끌고 와서 리어카에 짐을 싣고 이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도 그럴 것이 3동에서 5동은 걸어서 2분 거리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차를 빌리는 것보다 리어카가 훨씬 수월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둘째 이모네와 꼬마 이모라고 부르던 막내 이모네는 13동에 살았다. 할머니와 셋째 이모가 살던 집은 몇 동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막내 이모네 첫째 딸 방에서는 맞은편 14동의 어느 방에서 밤새 기타 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노랫소리가 벗님들이었다고 하는데 확실한 기억인지는 모르겠다. 정말이라면, 13동과 14동 사람들은 밤마다 벗님들의 라이브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성수 아파트 단지 안에는 작은 동산 같은 것이 있었다. 벚나무가 심어져 있어서 봄이면 눈이 내린 것처럼 하얗게 덮이는 아주 작은 동산. 그냥 흙더미라고 부르는 게 맞을 정도로 작은 그곳을 마치 등산하듯이 꼬박꼬박 걸어서 지났다. 버찌를 따먹기도 했다. 달지도 않고 과육은 별로 없이 씨만 커다랬지만, 그걸 먹으면서 맛있다,라고 말하면 왠지 어른이 된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


  어느 날 내가 살던 3동 벽면에 ‘강다민 바보’라는 낙서가 생겼다. 누구였을까. 지금도 궁금하다. 정말 궁금하다. 지금이라도 만나면 머리를 한 대 콩 쥐어박고 싶다. 너무 속이 상해서 한밤중에 몰래 나와 내 이름을 검은 크레파스로 칠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다음부터는 ‘(검은 동그라미)ㅇㅇㅇ 바보’만 한동안 남아있었다.


  성수 국민학교로 매일 등하교를 하는 일은 순탄치 않았다. 성수 아파트에서부터 학교 앞까지 온갖 크고 작은 공장들이 빼곡한 길을 지나야 했다. 가장 간판이 크던 ‘신도리코’ 공장 뒤에는 박스나 파쇄지를 버리는 곳이 있었는데 거기서 박스 안에 숨어 학교를 가지 않기도 했다. 철공소도 많았다. 불꽃이 팍팍 튀기는 소형 공장들. 목공소도 말할 것 없이 많았다. 화르륵, 날리는 톱밥 먼지들. 지금은 수제화 거리로 유명해졌다고 하는데 내가 어린 시절에는 신발을 만드는 곳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커다란 차들에 매연과 소음, 그 사이 어딘가에 신발을 만드는 곳도 있었던 모양이다.


  성수 국민학교는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옥상에서 온갖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었다. 학교 옥상에 소주병이 뒹굴고, 노란 돼지 본드와 비닐봉지가 발견되기도 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했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그만큼 환경에 노출이 쉬워서였는지 학교 아이들도 거칠었던 기억이 난다. 소각장에서 한판 붙자며 쪽지를 보낸 아이도 있었다. 6학년들 중에는 나를 찍어서 괴롭힐 궁리를 하던 무리도 있었다. 체육 시간에 조금 다쳐서 교실에서 울던 날, 같은 반 남자아이가 울지 말라고 했다. 자신의 엄마가 매일 울기 때문에 자기는 우는 여자가 제일 싫으니까 울지 말라는 게 이유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남자아이의 사연도 참 거칠었을 듯하다.


  소각장에서 한판 붙자던 머리가 길던 여자아이는, 반 지하 단칸방에서 할머니와 동생과 셋이 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이 나에게는 세상을 처음으로 마주한 순간인 것 같다. 아무리 쥐가 나오고 물이 새는 곳이어도 성수 아파트는 아파트였다. 놀이터도 있고 부모들은 직장도 집도 차도 가진 중산층이 대다수였다. 대부분이 비슷하게 닮은 모습이었고, 주말에는 외식도 하고 아이들은 학원에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성수 국민학교의 공장 지역에 사는 아이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아파트가 아닌 집, 엄마 아빠 형제자매로 이루어지지 않은 가족 구성원, 용돈은커녕 준비물 살 돈도 구할 수 없던 친구.


  재개발 이전의 성수동은 이렇게 기억 속에 남아있다.

  재개발이 확정되고 가장 먼저 동네를 떠난 것은 막내 이모네였다. 막 붐이 일기 시작한 분당 신도시로,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다음은 누구였더라. 넷째 이모네였을 것이다. 성수동에서 별로 멀지 않은 광장동이었다. 그즈음 삼촌이 아주 늦은 장가를 가면서 할머니네도, 둘째 이모네도 이사를 가고 우리 집도 일산으로 이사를 갔다. 재개발은 아주 오래 걸렸다. 십 년이 지나서야 다시 성수동으로 이사를 올 수 있었다. 우리 집에서 키우던 다롱이가 계속 동네를 떠돌아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철거가 되면서 어딘가로 간 모양이었다.


  새로운 아파트 단지에는 내가 알던 성수동의 모습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아이파크와 롯데 캐슬이 1단지와 2단지로 나뉘어있던 자리를 대신했다. 벚꽃 동산도, 놀이터도, 플라타너스 한 그루도 남지 않았다. 그 자리에 살던 사람들은 재개발이 되면서 모두 떠났지만, 아파트가 다 지어지고 나서 모두가 다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우리 집과 둘째 이모네가 돌아왔고 새롭게 큰 이모네가 성수동으로 등장했다. 다른 친척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살면서 위험천만한 놀이를 했던 친구들 중에는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아이도 있었지만 만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성인이 되고 코흘리개 시절의 친구를 다시 만난다는 것은 생각만큼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일은 아닌 모양이다.


  최근의 성수동 열풍이라는 것은 그 실체를 도대체가 알 수가 없다.

  마지막 남은 한강변의 미개발 지역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혹은 그런 말을 반복 생산함으로써 자동적으로 땅값이 오르게 된 건지, 건대나 세종대 부근에서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싼 지역으로 몰려온 젊은이들 때문인지, 어떤 것도 내가 살았던 어린 시절의 성수동과는 매칭이 되지 않는다.


  국민학교를 다닐 때 성수 대교가 무너졌다. 이사를 가기 전까지 그 다리는 다시 짓는 중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다리 맞은편의 압구정 현대 아파트나 한양 아파트 못지않은 집값을 자랑하는 아파트 단지가 건설 중이다.


  무엇을 지으려는 것인가. 그건 누구의 집이 되는 것인가.

  내가 사는 동네가 재개발이 된다면 돈을 벌 수 있어서 좋은 것인가.

  동네의 추억이라는 것은 한낱 노스탤지어에 지나지 않는 감상인 것인가.

  싼 값에 서울 시내에서 소형 공장을 운영할 수 있던 공장주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입소문에, 언론에 노출되는 정보만 가지고 무작정 가게를 오픈한 개인사업자들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더럽고 험악했던 골목이 깨끗한 아파트 단지가 되면 그걸로 좋은 것인가.


  어떤 질문은 나에게도 예스나 노, 두 가지 답을 모두 가지고 있다.

  어떤 질문도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답을 할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답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의 어떤 일도 모두에게 공통된 정의나 가치, 문제의식을 가진 일은 없다.


  그래도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싶은 생각이 든다. 어디는 비싼 동네이고, 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잘 사는 사람이야, 하는 정도의 가치판단은 어쩔 수 없는 빈부격차이고 경제논리라고 치더라도 이제는 점점 모든 동네가 다 잘 사는 동네이고 비싼 동네가 되어간다. 그곳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제일 빠른 선택은 죽음이다. 모두의 괴로움을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 기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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