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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보경 Dec 17. 2023

기악 반주 vs. 성악 반주

반주를 하다 보면 대개는 기악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성악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으로 특화 분야가 나뉜다. 기악은 또 현악, 관악, 금관으로 세분화되고, 그중에서도 첼로면 첼로, 클라리넷이면 클라리넷 이렇게 한 악기만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음악 레퍼토리가 방대하다 보니 모든 분야를 다 섭렵하기가 어려워서 그렇게 되는 것도 있고, 아무래도 일을 하다 보면 한번 같이 작업했던 사람들과 또 연결이 되니까 기회적인 면으로도 그렇게 되기가 쉽다.

나 같은 경우는 원래 '전적으로' 기악 전문 반주자였다. 그중에서도 현악 레퍼토리가 압도적으로 많고(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 모두 포함), 트롬본 레퍼토리도 좀 있다. 보통 금관악기는 반주자 사이에서 '엘리트' 분야로 여겨지지는 않는데, 나는 트롬본 하는 사람들의 정상적(?)인 성격과 유머가 좋아서 리퀘스트를 받다 보니 레퍼토리가 쌓였다. 미국에서 웃겼던 게 뭐냐면, 현악(특히 바이올린) 하는 사람들한테 내가 트롬본 반주도 한다고 그러면 흠칫 놀라는 게 보이고, 트롬본 하는 사람들은 내가 현악 반주 많이 한다 그러면 '걔네들 따분해서 어떻게 견디냐' 그랬다 ㅋㅋㅋ 애기 때부터 스파르타 훈련을 받지 않으면 전공이 안 되는 현악기와 중고등학교 때 밴드부 하다가 음대 오는 금관 애들 사이의 간극이 큰데 그게 넘 재밌어서 둘 다 놓치기가 싫었다.

아무튼 그래서 기악을 주로 했었고 예전에는 '나는 성악은 안 한다'고 대놓고 말할 정도로 성악 반주는 안 했었다. 요즘은 줄리어드 반주과가 instrumental(기악) vs. vocal(성악)으로 아예 전공을 나눴다는데 내가 다닐 때는 통합이었기 때문에 둘 다 배웠는데, 성악은 정말 학교에서 시키는 minimum requirement만 하고 늘 기악에 올인이었다. 성악곡도 좋은 게 많지만 기악곡만 평생 배워도 시간이 모자랄 판인데 굳이 성악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 컸다. (몸이 악기라 극도로 예민하신 성악가들을 떠받드는 것도 성가시고 말이다. 모든 성악가가 그런 것은 아닌데 내가 만났던 줄리어드 성악과 애들이 이상하게 유난스러웠어서 인상이 잘못 박혔음.)

그런데 작년부터 출강하는 학교에서 성악 반주를 가르치게 되어서 나도 성악곡을 공부하고 있고, 내년 1월에 함부르크에서 하는 연주에는 성악가들이 두 명이나 출연해서 1시간 분량의 성악곡을 준비 중이다. 작년에도 Richard Strauss, Mahler, Debussy 가곡 등을 연주했었고 이번에도 프로그램이 장난이 아닌데 나한테는 거의 다 새 곡이라서 요즘 수험생 모드로 연습을 하고 있다. 예전에 그리 기피했던 성악인데 내가 이렇게 성악곡을 죽어라 연습하게 될 줄이야...

성악가들이랑 리허설을 하면서 내가 얼마나 기악에 익숙해졌는지를 깨닫는 중이다. 사실 나는 가사를 안 듣고 소리를 듣는 경향이 크다. 이건 타고난 성향이기도 한 게, 어릴 때 가요를 들어도 내 동생은 가사에 집중해서 노래를 듣는 반면 나는 노래의 분위기와 선율만 들어서 좋아하는 노래인데도 가사를 잘 몰랐다(하이라이트 부분만 부를 수 있음 ㅋㅋ). 성악도 기악과 마찬가지로 소리의 spin, color 등이 있으니까 기악이랑 비슷하게 들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던 거지. 성악에서 뭐니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가사인 것 같다. 가사를 듣지 못하면 성악 반주는 잘 할 수 없을 듯.

솔직히 내가 미국에서 성악 반주를 별로 안 좋아했던 다른 이유는, 성악 반주를 하는 사람들은 피아노 다루는 능력은 좀 떨어지는데 그걸 가사 해석 등 학문적인 썰로 커버를 하려는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노래 가사를 무슨 한국에서 수능 언어영역 다루듯이 분석을 하는데 (골치 아파서 가사 들여다보기 더 싫어짐) 그럴 거면 언어학자를 할 것이지. 자기 입으로 시가 이런 분위기라고 말했으나 피아노를 칠 때는 사뭇 다른 느낌 어쩔 건데... 작곡가들이 바보도 아니고 가사의 분위기를 음악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없겠어? 기악을 잘 하는 사람은 성악곡도 충분히 잘 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건방진 착각이었다.

가사를 학자처럼 분석할 필요는 없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그러나 시의 운율이 어떻게 흐르는지(phrase), 단어의 악센트가 어떻게 디테일한 뉘앙스(articulation)를 만들어내는지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가사의 모든 내용을 해석할 순 없더라도, 언어에 담긴 운율과 뉘앙스를 표현하는 것까지가 음악이다. 예전에 라디오에서 도밍고가 한국 가곡을 부르는 것을 들었는데, 발음이 완벽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도밍고는 한국어를 1도 모르겠지만 언어를 음악으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것이다.

기악은 내가 곡을 알아서도 그렇겠지만 소리의 flow, spin, articulation 등이 딴짓하면서 들어도 들리는데, 성악은 소리를 듣는 것에다가 + 언어의 흐름(liaison) & 주요 자음(consonat)의 강약까지 들어야 하는데 아직 거기까지는 안 들린다. 피아노 치는 것 말고 가사 공부가 많이 필요하다. 이렇게 배울 것이 끝이 없다니... 약간 심적인 부담이 있긴 한데 그래도 학생 때처럼 안달복달하며(ㅡㅡ;;) 계속 공부하도록 이런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감사하다. 이렇게 살면 정신은 안 늙겠지..? 젊게 사는게 쉬운 게 아니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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