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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빛 Jun 19. 2021

프로농구와 뇌출혈의 역학관계

“환자분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 상황에 회사가 무슨 소용입니까. 쉬면서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의사 선생님은 뇌출혈 판정과 함께 엄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회복에 전념하기 위해선 일터를 벗어나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스트레스 받는 상황, 자극적인 음식, 강력한 운동, 섹스까지도 모두 피하라고도 덧붙히셨다. 젊은 나이어서 쓰러지지 않은 게 다행 일순 있겠지만, 언제 또 뇌혈관이 터질지 모른다는 공포는 한순간에 나를 집어 삼킬것 같았다.


그때가 벌써 10여년 전이고 그 시절 알게 된 사람이 바로 지금의 동거인 남편이다. 미세한 혈관을 뚫고 나온 혈액이 뇌의 상당 부분에 침윤해 최저 혈압이 50을 왔다 갔다할 무렵이었다. 다행히 큰 일 발생하지 않고 위기는 넘겼지만, 혈액이 흡수되길 천천히 기다리며 삶을 재정비 중이었다.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극적인 삶을 청산해야 하는 시기, 아무런 자극이 없는 그 사람이 내게 필연으로 다가온 것이다.


뇌출혈 환자들은 머리에 폭탄이 설치된 것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집 밖에 나갔다가 길거리 위에서 쓰러져 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내게 그 사람은 폭탄을 자극할 확률이 제로에 수렴하는 사람이었다. 어조의 높고 낮음이 없고, 표정의 변화도 크지 않은 사람. 가만히 앉아 책 읽기나 좋아해서 재미없는 사람. 내가 화를 내어도 크게 미동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느끼는 극도의 안정감은 그동안 만나온 사람들에게선 느낄 수 없는 무엇이었다.


젊은 나이었던 만큼 나는 무서운 속도로 회복했고 어느 정도 원형의 성질로 조금씩 돌아갈 수 있었다. 콘서트도 가고 국내 여행도 갈 수 있는 정도가 되었을 때, 남편은 나의 옛모습에 속은 것 같다고 했다. 분명 창백하고 여린 사람이었다고 말하곤 한다. 실제 몸무게의 차이도 10kg에 육박한다.

'나 역시 그 시기가 아니었더라면 너를 선택하지 않았을지 몰라.'


그런 이유로 연을 맺게된 재미없고 단조로운 남편에게도 유일한 취미이자 관심사가 있다. 바로 농구와 야구경기다. 오늘은 미국 프로농구(MBA)가 하는 날이었다. 혼자 텔레비전 앞 침대에 편한 자세로 누워 경기를 관람하던 그는 키득 거리다 ‘아....’하고 탄식한다. 누군가와 카카오톡 대화도 나눈다.


신혼 초엔 참 싫어했던 이 광경을 호기심 있게 살펴본다. 어떤 이상 행동도 꾸준하면 특질로 인정하게 된다는 걸 실감한다. 게으름뱅이 카우치쇼파맨에서 프로 덕후 정도로 승격했달까. 뇌출혈과 프로농구의 복잡한 역학 관계처럼 남편을 바라보는 마음은 복잡하다못해 신비롭다.


그가 응원하는 경기는 매번 패배하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오늘은 그가 응원하는 LA 클리퍼스가 창단 51년 만에 콘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했다. 폴 조지 선수도 28점을 득점했다며 기뻐한다. 폴 조지가 나이키 운동화의 모델명인 줄 알았던 나는 그 팀의 승리에 어떤 의미가 있는 일인지는 잘 모르고 있다. 눈치 상으론 뭔가 대단한 기록인 것 같다.


한화 야구 경기가 끝날 때마다 집안에 퍼졌던 싸늘한 기운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괜찮은 주말 오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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