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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빛 Jun 23. 2021

자줏빛 비가 내리는 시간

자우림 콘서트 <잎새에 적은 노래> 관찰 일기

지난 19일  자우림 콘서트 [잎새에 적은 노래, 안단테 드라마티코]에 다녀왔다. 코로나로 지난해부터 계속 취소되다가 이번에 열린 것이다. 공연은 환호, 떼창, 함성을 금지하는 엄격한 규칙 속에 진행됐다. 덕분에(?) 신나는 음악은 공연에서 모두 배제되었다.


정규앨범 10집을 포함해 총 170곡을 보유한 자우림의 오롯한 음악을 만나기에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자우림의 음악은 대체로 자줏빛을 띄는 깊고 짙은 어둠의 느낌이 강한 편이다. 자우림 멤버들도, '사실은 이런 어두운 음악 공연 늘 하고 싶었어요.'라며 공연을 시작했다.

(매직카펫 라이트, 헤이 헤이 헤이, 일탈 등 자우림의 대유행 곡들은 신나는 리듬을 갖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히트 음악들은 자우림의 색깔과 살짝 다른 결이다.)




공연 첫 곡 '서울 블루스'를 들을 때는 당황스럽게도 눈물이 줄줄줄 흘렀다. 여기저기서 환호 없는 박수가 뜨겁게 터져 나왔다. 마스크를 뚫고 나갈 것 같은 환호는 가슴속에서만, 아주 조용히 짝짝짝 박수치는 이 광경은 코로나 시기에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리. 기타리스트 김선규는 공연을 하지 못했던 동안 정체성을 고민했다며 울컥했고, 베이시스트 김진만도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김윤아는 여전히 단단하고 매끄럽게 팀을 리드하고 있었다. 최소한의 악기와 목소리로 구성된 공연은 고요하지만 강력한 에너지를 뿜고 있었다.


객석을 꽉 채운 남녀노소의 자우림 팬들

<세트리스트>

서울 블루스 / 이카루스 / 피터의 노래


위로 / Over the rainbow / 우리들의 실패 / 모닝 왈츠 / HOLA!


Something Good / 슬픔이여 이제 안녕 / 꿈에 /  미안해 널 미워해 / 반딧불 / 팬이야 /  행복한 왕자


있지 / 샤이닝 /  영원히 영원히 /  무언가


스물다섯 스물하나 / 잎새에 적은 노래


"아름다운 건 모두/너에게 받았지/다정한 그리움과/잎새에 적은 노래들/ 아름다운 것 모두/지금 여기 새길래/모르는 새 어디론가/사라져 버릴 걸 알잖아/너와 걸은 모든 길이/별처럼 빛난다"


신곡 <잎새에 적은 노래>는 시적인 가사와 담담한 멜로디를 노래한다. 자우림은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 곡을 작업했다고 한다. '기쁘게 만나러 갈 친구들이 있다니 참 좋은 인생이었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그들의 말에 나도 오랫동안 함께한 인생의 친구들이 떠올랐다.


동일한 멤버들과 오롯이 20여 년의 밴드 생활을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각자 멤버의 관심과 지향이 변화할 것이고, 성장의 속도가 다를 것이고, 개인의 인생 여정도 다를 것이다. 밴드가 지속되는 것은 함께 무대를 만들고 싶은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과 '신뢰'로 지속되는 것 아닐까.  기타 줄을 조율하듯 서로가 얼마나 민감한 조율을 통해 매 앨범을 작업하며 팀을 이어왔는지 이제는 상상이 된다.




나는 오랜 기간 동안 자우림을 떠올릴 때 프론트맨 김윤아만을 떠올렸다. 그래서 그동안 자우림을 '전체'로 보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는 이상하게 기타리스트 김진만과 베이시스트 이선규가 보였다. 좋은 팀이 함께 오래갈 때는 그 각 구성원의 드러나지 않은 능력이 커다란 원동력이라는 걸 인생 경험을 통해 감히 가늠해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선규는 공연 중에 이런 말을 했다 "과거에 공연을 할 때는 우리 멤버들만 봤다. 잘하고 싶고 완벽하게 좋은 음악을 들려드리고 싶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관객이 보인다. 내가 소리를 낼 때 민감하게 느끼고 있는 그 관객들과 소통을 하는 쾌감을 느낀다." 내가 늙고 내가 보는 관점이 변화하듯, 밴드도 함께 성장한다. 


타인과 조율하는 것, 내가 오랫동안 일하고 공부하며 느끼는 마음이기도 했다. 자신의 분야에서 민감한 조율을 할 수 있는 감수성을 유지하는 것이 전문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늘 깨어있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가다듬는 수행자와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https://youtu.be/eciih6MmZk4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일들입니다. 성취하고 성공하고 싶은 마음,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 표현하고 인정받고 이해받고 싶은 마음,  반려를 찾고 싶은 마음이나 아이를 가지고 싶은 마음도 결국 모두 내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생겨나는 것들입니다.

왜 우리는 자신의 존재와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을까요. 우리는 우리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아무것도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 내면에 새기기에도 모자랍니다.

                                                                    - 자우림 <잎새에 적은 노래> 인사말


자우림의 여정을 보고 있노라면, 인생의 면면들을 생각하게 하는 지점들이 있다. 김윤아는 공연 중에 "저는 행복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제가 행복하기 위해선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행복해야겠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고민하고 노력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만 잘하고 싶고 나만 잘 보이고 싶었던 열정적인 청년이 아니라, 함께 행복하고 싶고 함께 행복하고 싶은 중년의 마음을 나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행복을 나누고 싶은 그 당연해 보이는 마음이 사실은 인생을 충실히 살아온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에서 비롯됨을 이제는 안다.




세상의 예술가가 모두 같은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장르를 고집스럽게 이어나가는 과정에 따라붙는 수많은 유혹과 고통스러운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한 사람들을 예술가라고 말하고 싶다. 그 과정을 꾸준히 양질의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노력한 분들에게만 예술가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싶다.


우리도 성숙해가는 음악처럼 함께 인생을 배워간다. 그래서 함께 팀을 이어나가며 성장해가는 아티스트가 있다는 것은 너무 값지고 소중한 일이다.


코로나로 정말 오랫만에 갔던 공연장이었는데 자우림의 노래들은 어김없이 참 좋았다. 동시대를 열심히 살아온 한 명의 팬으로서, 나는 자우림의 존재가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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