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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jin Mar 17. 2024

부러진 우산

나도 쿨한 여자가 되고 싶다

이 글은 2021년 4월 8일에 처음 썼고, 2024년 3월 17일 덧붙이며 다시 쓴다.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들어 대표에게 더 이상 못하겠다고 했더니, 쉬고 오라고 해서 제주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제주 온 지 딱 일주일째 되는 날 아침 오랜만에 날카로운 꿈에서 깨어났다. 독립하여 혼자 나와 산 지 두 달 만쯤 됐을 무렵이기도 했다. 혼자 지내는 데 어느 정도 적응함과 동시에 쓸쓸함도 외로움도 묵묵히 견뎌야 함을 체득하는 중이었다. 독립한 이후 작지만 나만의 공간이 주는 안락함에 꽤 잘 적응했고, 잠도 잘 잤고, 여간해서 꿈도 잘 꾸지 않았다. 깊이 잘 자고 있다는 거겠지. 불안하고, 힘든 상황임에도 모르긴 몰라도 잠은 잘 자고 있구나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여행 일주일 차에 기분 나쁜 꿈에서 깨어난 거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었다. 딱딱한 매트리스가 불편했고 간밤 추위에 몸을 떨었고, 새벽에 움직이는 사람들 때문에 깊게 잠들지 못했으리라. 여느 때처럼 여전히 헤매고, 미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꿈이 아니었다. 전 연인이 또다시 등장했다.


꿈속 내용은 이러하다.


비가 오고 있었다. 우산을 쓰고 가다 좁은 골목 모퉁이에서 그와 딱 마주쳤다. 서로 눈이 마주쳤고 당황한 나는 서둘러 우산으로 내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아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뒤를 돌아보니 그가 내 옆에 함께 쪼그리고 앉아 있었고, 나에게 새 우산을 건네며 쓰고 가라 했다.


한 동안 그가 나오는 꿈을 꾸지 않았었는데 오랜만에 꿈에 그가 나온 것도 짜증 났지만, 이 꿈에 여러 가지 현실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있어 마치 현실의 나를 채근하는 거 같아 더 화가 났다. 


비 오는 상황. 당시 제주 강풍 우산살이 부러진 우산을 쓰고 다녔다. 막상 새로 사려니 짐이 늘어나는 게 부담스럽고, 강풍인지라 제대로 된 우산을 쓴다 해도 비를 피할 수 있을 거 같지 않아서 부러진 우산을 용케 들고 다녔다. 그가 새 우산을 건넨 걸 보면, 꿈속에서도 나는 부러진 우산을 쓰고 있었나 보다. 


왜 우산으로 얼굴을 가렸는가. 그와 마주치자 나는 황급히 얼굴을 가렸는데, 그건 그를 마주하고 싶지 않고 모른 척하고 싶은 마음이 반, 혹시나 최근 막 시술해서 어색해진 내 눈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 반이었던 것 같다. 


나는 왜 주저앉았는가. 혹시 그가 나를 알아보고 아는 척하지 않을까 하는 하는 마음에서 기다린 거다. 이 대목이 가장 화가 나는 포인트다. 나는 꿈에서 언제나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가 결코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하염없이 기대하고, 기다리는 꿈을 여러 번 꾸었다. (지금도 종종 꾼다.) 꿈이지만 여전히 그가 나를 알아주기를, 다가와 주기를 기다리는 내가 지질해서 참을 수가 없다.


그와의 재회. 뒤돌았을 때 그가 있어 아주 잠시 기뻤던 것 같다. 기쁜 마음이 드는 것도 화가 난다.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면서 기다리고, 또 봐서 기뻤다니. 우산을 쓰고 같이 가자고 했으면 기절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건넨 우산의 의미. 이제 그만 헌 우산을 버리고(이젠 그를 완전히 잊고), 새 우산 쓰고 새 출발 하라는 게 아니었을까. 혼자 깨어나 잠시 멍하니 꿈을 곱씹다가 의미부여를 해 본다. 내가 그가 건넨 우산을 받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꿈속 행동들을 후회했다. 마주쳤을 때 피하지 말고 잘 지내니? 나는 엄청 잘 지내,라고 쿨하게 인사할걸.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주저앉지 않고 그대로 내 길 갈걸. 그가 다가왔을 때 혹시나 재회의 기쁨이 얼굴에 드러났진 않았을까. 그가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채진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밑도 끝도 없이 하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스럽다. 역시나 헌 우산을 버려야 할 때지만 여전히 새 우산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만 깨닫고, 망연히 우산 없이 빗 속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다. 


사실 나 되게 못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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