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의 말캉함
베를린에 오고 살게 된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어디 사냐고 물어보면 "독일에 산다고 하지 마세요, '베를린'에 산다고 하세요. 베를린과 나머지 독일은 완전히 다른 곳이니까요." 라고 말한다.
그만큼 베를린이 독일에서, 그리고 유럽 전역에서 차지하고 있는 독특한 위치와 도시만의 정체성이 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정된 정체성을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서로서로가 엮이고 섞여서 함께 도시를 만들어가며 집단적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곳이랄까?
베를린에서도 독일스러운 점은 어느 한 곳이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을 독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일의 교육도 그렇고, 대기업도 그렇고 어떤 곳이 다른 곳보다 어떤 점으로 인해 유명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다른 도시로부터의 우월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구조적인 면이 아니라도 단순한 식당 선택에도 큰 경쟁이 일어난다. 최고의 곳에서만 먹겠다는 생각은 그렇지 않은 곳에서 먹으면 그것이 마치 나의 가치인 것처럼 동일화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비슷하게, 베를린을 포함해 독일 사람들은 일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나의 일부이고 내가 할 수 있는 활동의 하나이지, 일의 성과가 내 존재 가치를 좌지우지 하지 않으며, 그건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때나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때나 개인적 충격과 오만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가 풍부하기 위해선 내 일에 몰빵했을 때가 아니라 어떤 상황과 사람과 있어도 풍성한 존재가 되는 것에 더 가치를 두는 것 같다.
이제 베를린으로 다시, 나는 이 도시를 정말 사랑하는 것 같다. 어떤 거리와 동네를 가면 그 곳에 머물렀던 추억과 함께한 사람들이 떠오른다. 마치 다른 도시에 살다가 다시 돌아온 것처럼 같은 도시지만 골목과 동네 곳곳에서 풍기는 분위기, 냄새, 색깔, 사람들이 저마다 다르다. 테크노 문화가 최근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될만큼 베를린을 대표하는 문화 양식과 놀이의 하나다. 그렇지만 베를린에 와서 이 테크노 문화를 바로 눈에 띄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맞는 곳에 맞는 사람들을 찾아야 즐길 수 있다. 그것이 좋다. 대형 광고와 홍보가 없이 추종자를 만들어내는 이 하위문화의 보편성과 독창성, 예전에 비해 많이 잃어가고 있다고 OG -original gangster - 들은 말하지만, 동시대 속 다른 대형 도시에 비하면 베를린은 아직도 베를린스럽다고 말하고 싶다.
공부와 한국어 수업, 생활과 목표 사이 의식하지 못할 때에도 늘 긴장을 하고 있는 나에게 베를린에서 만난 친구들은 늘 나에게 말랑하고 뭉친 근육을 쭉 땡겨주는 그런 마사지사 같은 (?) 존재들이다. 오늘도 힘 좀 더 빼고 크게 숨 들이 마시자! 그리고 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