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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nshi Hachi May 20. 2024

소중한 순간을 잃지 않기

질문.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순간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잠들기 전 휴대전화와 애플워치, 아이패드, 보조배터리 등 전자기기를 거치식 충전기에 올려놓는 순간이다. 아이콘이 바뀌고 배터리가 조금씩 차오른다. 휴대전화를 쥐었을 때 느끼는 피로와 양가감정이 조금 사그라든다. 전자기기를 손에서 내려놓고 싶어 하는 나와 계속 보는 나 사이에 피로를 내려놓는 만족감. 빈손의 허전함마저 만족스럽게 느껴진다.


사진으로 추억을 돌아보는 시간도 좋아한다. 사진을 볼 때 나와 나 사이에 생기는 간격이 마음에 든다. 거울을 보는 것도 좋아한다. 생각해보면 내가 나에게 거리를 느끼는 순간, 내가 너무 나로만 느껴지지 않을 때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큰 변화 없이 같은 모습으로 30여 년의 시간이 흘러왔고 스스로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여러 감정이 온다. 물론 크지 않은 변화 속에 이어져 온 마음에 드는 장기 프로젝트 같은 변화들도 있다.


일을 하면서 전신 거울이 있는 층에서 아무도 없을 때 조용히 몰래 거울을 자주 봤다. 내가 어떤 얼굴과 부피로 존재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하루 10분 내외의 월루였다) 거울 보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감정을 비춰보고 싶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뭔가 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거울을 보면 어느 날은 표정이 좀 어둡거나 차림새가 덜 마음에 들어도 내가 그 자리에 하나의 물질로 살아 있었다.


2024년 5월 20일 오전 2시 37분. 오랜만에 모니터 앞에 앉은 기분이다. 위의 글을 틈틈이 썼지만, 상황에 조금 절여져 있었던 것 같다. 하루를 펴지도 않고 빨리 덮어버리는 기분으로 보낸 날들이 있다. 구독을 끊었던 밀리의 서재를 다시 구독하고 김신지 작가의 《기록하기로 했습니다.》를 읽기 시작했다. “같은 순간은 절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어제 낮 태릉시장 길거리아에서 햄버거를 사고(일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는데 장미축제 기간이라 문을 열었다고 한다) 꽃집에 들러 내가 고른 하나에 천원 다육이 세 개, 엄마가 고른 세 개에 오천원 다육이 총 여섯 개 샀다. 내가 고른 건 피라미달라스(?), 벽어연, 하나는 사진 검색 해도 이름이 안 나온다.

  

계산하고 인사하는데 꽃집 할머니가 “예쁘게 보세요”라는 말로 인사해주셨다. 그 말을 마음에 담았다. 나에게 필요한 말이고 중요한 말이라는 감이 왔다. 이런 감이 오는 순간도 좋아한다. 어디서 저런 말이 나왔을까, 하고 생각하면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 저런 인사말을 어떤 마음으로 생각하고 발명해냈을지 궁금하다. 내가 사람을 궁금해하는 시작점은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인 것 같다.


나 스스로 무언가를 ‘잘 보고 있구나’ 생각하는 순간도 좋아한다. 그 대상은 좁은 시야나마 나의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일상의 모든 콘텐츠와 눈이 아닌 것으로도 볼 수 있는 것들을 포함한다. 누구의 기준도 아닌 나의 기준으로 좋은 것을 알아보는 순간도 내가 나에게 맞는 자유를 획득하는 순간이다. 근래 나를 책임지지 않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온전히 나를 책임지는 자유를 상상하는 중이다.


근래 책을 읽는 일이 자유를 획득하는 일로 연결되는 경험을 했다. 그 계기가 된 책은 이은경 작가의 《여자가 운동을 한다는데》. 일상에서 느끼는 사소하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큰 불편함을 이 책을 읽으면서 덜 수 있었다. 마음에 쌓아두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여성과 운동에 대해 잘 말하는 책이다.

    

야외 농구 코트에서 공을 던지다 보면 “공을 던지는 것만도 잘하는 거다” “대단하다”라는 칭찬 같은 칭찬 아닌 오묘한 말들이 불편한 순간이 있고, 금세 몰입해서 읽게 됐다. 읽는 행위를 통해 몸이 자유로워지는 경험은 여성과 운동을 다각도로 바라보는 책의 눈과 목소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줄곧 책 읽기를 좋아하면서도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밀리의 서재를 재구독하면서 좋아한다는 생각을 선택하기로 했다. 책 읽기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언제나 책 읽기 밖에 있다. 짐작으로는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가장 큰 이유지만 다른 이유도 많을 거다.


어쩌면 전자기기를 충전하는 순간을 좋아하는 이유는 ‘필요할 때 쓸 수 있기 위해서’다. 사진을 보며 추억을 돌아보는 일도 배터리가 충분한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어서 남길 수 있어야 그 이후 가능한 일이다. 충전해두지 않으면 필요한 순간 쓸 수 없다는 불안이 공존하는 셈이다.


책을 읽을 때 마음이 불편한 이유도 모든 걸 다 기억할 수 없다는 마음의 불안이 가장 크다. 결국 소화하지 못할 일을 한다는 마음의 부담이 마음의 체력을 바닥나게 하는 것이다. 다 하지 못해도 계속 할 수 있게 방전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소중한 순간을 잃지 않기. 기억하고 기록하기.


유일하게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걷는 순간이다. 걷는 동안 나는 시시각각 달라진다. 모습부터 마음부터 생각부터 바람이 부는 방향과 빛을 받는 방향과 지나치는 사람. 물론 다시 마주치는 사람도 있다. 요즘 마음에 둥둥 떠다니는 말 중 하나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다. 사람의 연은 정말 가늘고도 길다는 사실. 그렇게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 순간도 좋아한다.


이 식물 이름 뭘까요
연노랑이 귀여워서 사야 했고
연분홍이 귀여워서 사야 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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