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내가 좋아하는 사랑의 형태
나의 사랑은 과한 의미 부여로 시작된다. 의미 부여는 혼자 마음을 키우는 방식이라서 균형이 안 맞고 기울어진다. 가끔 그 기울기에 몸을 싣기도 한다. 감정적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상태에 놓인다.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한다. 나의 사랑은 의미 부여로 시작돼서 의미 부여로 끝난다. 그래서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 적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의미 부여를 하는 이유 : 재미있다.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생각한다. 상상은 자유다.
어릴 땐 특별하다고 느껴지는 사랑이 좋았다. 나이 차이가 많은 사람이나 선생님을 좋아하고 그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시 카와하라 카즈네의 《선생님!》이라는 만화를 좋아하기도 했다(지금도 좋아함).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원하던 사랑은 편애였던 것 같다. 치우치는 사랑을 받고 싶었다.
이상형을 묻고 대답하는 게 재미있었다. 지금은 이상형이라는 고정값이 없다.
지금껏 살면서 사람을 봐오면서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다는 사실, 모든 사람은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어릴 적에는 단점이 하나만 있어도 쉽게 미워하고 싫어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 모순적인 면을 하나둘 수집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단점도 이해하게 됐다.
이해하고 알고 있다고 해서 언제나 수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단점을 보고 실망하고 쉬운 실망을 반성하기도 한다. 나에게 자주 실망하다 보면 내성이 쌓이기도 하는 것 같다. 실망해도 나를 조금 봐주자는 생각도 한다. 그렇게 봐주고 봐주고 봐줘본다…….
경험할수록 다른 사람의 입장에 앉아볼 수 있는 자리가 하나씩 생기는 것 같다. 어떤 입장에는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지만 그래도 비슷한 풍경을 비슷한 시각에서 상상해볼 순 있는 것 같다. 상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는 않는다.
요즘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인간은 장단점이 있고 그 단점마저도 괜찮다고 생각해보는 연습이다. 그게 어떤 끝에 도달하더라도 감당할 마음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게 요즘 내가 일관되게 지키고 싶은 태도다.
그리고 애매한 관계는 끊어내기로 마음먹는다. 애매함이 상대에게 피해를 줄 때 존중 없음이자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사랑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계기가 있었다.
한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하나를 깨닫고 하나를 배운다. 나는 하나에서 열을 배우지는 못한다. 방어기제 없이 마음을 표현하면서 사람을 통해 하나하나 배우고 싶다. 그리고 배운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다. 나는 배움을 사랑하고 사람을 통해서 가장 많이 배운다. 이 자체가 사랑일지 모른다.
사람을 보고 만나는 것. 세상에는 내가 알 수 없는 많은 사람이 있고 누군가에게는 내 말이 닿는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