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말펜사 공항에서 파리 오를리공항으로의 이륙을 기다리며 했던 메모가 다시금 눈에 들어온다.
파리여행 2주 차, 여행의 피곤함으로 현실을 잊어갈 때쯤 공항의 기다림은 나를 생각의 길로 안내한다. 쉽게 동양인을 찾아볼 수 없는 생경한 풍경이 낯설었고 그러다 내가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 소름이 돋았다.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가? 나는 이제 더 이상 나를 먹여 살릴 월급이 나오지 않는데?!’ 그런 현실에 닭살이 오도독 돋았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파리의 작은 공항에 앉아있는 나, 파리에서 이탈리아 밀라노와 루가노 호수를 1박 2일로 둘러보고 떠나는 나, 이런 내 모습은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만약 도망치지 않고 계속 그곳에 있었더라면, 나는 똑같이 괴로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겠지. 이런 낯설고 새로운 경험을 미룰 수밖에 없었겠지. 잘했다. 아주 잘했다. 스스로를 그렇게 칭찬하니 머릿속에 한 줄이 남았다. 그 기분과 생각을 놓치지 않으려 급하게 휴대폰 메모장에 한 줄을 갈겨썼다. “그래도 퇴사하길 잘했다”
하지만 공항에서도 노트북을 켜고 내내 일처리를 하고 있는 듯한 옆에 앉은 이탈리아 아저씨의 타자 소리가 영 거슬렸다. 저렇게 자기 일에 매진하고 있는 사람이라니. 차림새로 보아 출장길이겠지? 나는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고, 그 어떤 일도 해낼 수 없을 것 같은데. 내가 십여 년간 해 온 일은 회사를 나온 순간 이렇게 쉽게 툭 끊어지다니 야속했다, 그 시간들은 어디로 흩어졌는가.
공항에 앉아 다음 목적지를 기다리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생각은 나를 들었다 놨다- 기분도 오르락내리락했다.
퇴사 후, 어느 날은 어두운 독서실 책상에 스탠드 불빛 켜듯, 번뜩 내가 세상 최고가 된 것 같고 엄청난 자유를 얻은 것 같다. 더 넓은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나는 더 잘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휩싸인다. 그러다 또 어느 날은 내 책상 위로만 쏟아지는 작은 불빛을 제외하곤 모든 게 캄캄한 어둠처럼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패배감이 밀려온다. 그럴 때마다 이탈리아 말펜사 공항에서 갈겨쓴 한 줄 메모를 기억한다.
문득 불안해도 “그래도 퇴사하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