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계 의원과 함께하는 ‘한국형 갭이어 발전방향 토론회’ 발제문
통상적으로 갭이어는, ‘청년기에 정규 교육 기관에서 교육받거나 취직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탐색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재설정하는 6개월에서 1년의 시간’ 으로 정의된다. 영미권에서 사용되는 갭이어 또는 전환년(Transition Year)의 용례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 에 등장하는 귀족 자제들의 세상을 돌아보기 위한 여행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다 보니 갭이어라는 단어 자체가 폭넓은 경험을 위한 여행을 의미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이랩은 떠나지 않고 경험하는 갭이어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 자신의 외적 조건을 낯설게 바꾸는 것은, 외국으로 떠나지 않아도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이랩은 청년의 진로에 관한 논의가 분분한 가운데 탄생했다. 청년 당사자가 스스로의 진로를 찾아나가는 과정을 연구하고 설계해보는 활동을 하기에 ‘청년길찾기연구모임’이라 불린다. 사이랩은 지금의 청년들에게 꼭 필요한 힘을 ‘자기 세우기와 함께 살기’로 정리하고, 그것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지를 찾는다. 주요 활동으로는, 청년 대상의 자기탐색 워크숍, 커뮤니케이션 워크숍, 기획여행, 자체 심포지엄 및 발표회 등의 활동이 있다. 특히 2018년부터는 서울시의 청년인생설계학교의 실행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연결과 사유의 방’이라는 청년커뮤니티 활동을 함으로 청년인생설계학교 참여자가 활동에 대한 맥락과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사이랩은 사이(4.2/between)+LAB(연구공간) 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4.2는 법정최저주거면적 4.2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이 마음껏 활개칠 수 있는 시공간을 만들고 싶었던 의지를 의미한다. 2014년 겨울부터 기획되어, 2015년 4월 시작된 사이랩은 실험적인 파일럿 프로젝트였다. 청소년 길찾기 교육에 대한 3년간의 실제적 노하우가 있었던 대안교육공간 공간민들레와 교육전문출판사 민들레출판사의 주도로, 청년 지원을 고민한 다양한 주체가 모여 함께 기획했다. 청년 당사자까지 기획에 참여해 청년들에게 실제로 유용한 길찾기 과정을 구성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공공성을 강조하여 전액 무료로 진행되었고, 참여하는 멤버들은 스스로의 성장을 위해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다. 주 1회 이상의 그룹미팅, 퍼스널 브랜딩 및 커뮤니케이션 워크숍, 글쓰기 강좌, 역사 강좌, 문화연구 강좌, 미술치료 리더양성 과정 등 강도 높은 강의 및 워크숍을 받았으며, 그 내용을 정리하여 다른 집단을 위한 캠프, 발표회, 심포지엄, 포럼을 기획하고 실행하였다. 2016년, 여전히 청년들에게 꼭 필요한 공간이라는 판단 아래 참여했던 청년들이 자체 운영하는 체제로 바꾸어 운영 중이다. 2019년에는 청년 읽기 모임을 열어 함께 텍스트를 읽고 분석하는 활동도 진행했다.
사이랩의 경험에서 주목할 점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사이랩의 경험이 결과적으로 갭이어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떠나지 않고 겪는 갭이어가 가능한가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사이랩의 멤버들은 다른 사회로 이동한 것이 아닌데도 그전과 너무 다른 환경에서 활동하다 보니, 갭이어에 준하는 인식의 전환을 경험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대안교육이 아니면서도 대안교육인 환경, 참여하는 모두가 다 다른 성장배경과 대화 습관을 가진 사람들끼리 함께 배우고 함께 일해야 한다는 조건. 그러면서도 참가비에 대한 부담 없이 대부분의 활동을 할 수 있고 여유만 된다면 개인이 원하는 걸 실험해볼 수 있는 환경. 그런 환경에서 1년을 보내니, 외국에서 갭이어를 보낸 것 마냥, 새로운 관점과 기술과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이랩 경험을 요약하는 딱 두 가지의 키워드를 뽑자면 ‘실험’과 ‘커뮤니티’다. 사이랩에 참여하며 청년들은 사회와의 소통을 시작했다. 작은 사회와 마찬가지인 사이랩 커뮤니티 내에서 청년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서로 기여하는 호혜적 문화 속에서, 사회와 나 사이를 연결하는 단초를 찾았다. 그리고 1년간 가족이나 친구들이 아닌 사회와 개인에 관한 공적인 대화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커뮤니티, 마음 놓고 서로를 의지하며 비빌 언덕이 되어줄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고 그 안에서 활동하는 경험을 했다. 이러한 경험을 더 많은 청년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이,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와 청년인생설계학교로 이어졌다.
2017년, 사이랩 출신 멤버들은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의 갭이어분과에 참여하여 갭이어가 무엇인지 한국 청년들의 입을 빌려서 정의해보고, 서울시에 갭이어 정책을 제안하고자 했다. 마침 청년들의 자존과 자립을 고민해 보자는 흐름과 맞물려, 사람들에게 1년 혹은 그 이하의 일정한 시간을 주고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자는 의미로 갭이어가 정책으로 추진될 수 있었다.
발의할 때 중점을 두었던 부분은 서울시가 청년들에게 “사회에서 인정받는 공백”을 보장해야 한다는 부분이었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청년들에게 “왜 젊은 나이에 놀고 있냐”고 다그치는 사회기 때문이다. 청년인생설계학교는 그 공백을 준비하기 위한 설계를 배우는 시간으로서 발전했다. 갭이어라는 공백의 사전 준비와 사회의 인식을 바꿔나가는 사후 작업을 모두 고려하여 기획되었다고 보인다. 서울시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스스로 서서 살아가기 위한 준비는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그 준비를 혼자 못하는 건 틀린 게 아니다.”
2018년 청년인생설계학교에 참여했던 청년들은 서울시가 자신들을 위한 경험의 장을 지원한다는 것에 심리적 안정감을 느꼈다. 서울시의 정책 가운데서, 구체적인 진로 설계의 과정을 밟지 않고 있는 청년들을 이만큼 지원하는 정책은 찾기 힘들다. 앞으로도 미래에 대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게 하는 것보다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되살리고, 작은 단서를 발견하게 한다는 소박한 목표를 기준으로 설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사이랩과 민들레에서는 꾸준히 커뮤니티의 중요성을 이야기해 왔고, 혼자 보내는 갭이어가 아닌 함께 보내는 갭이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청년인생설계학교 내에서 커뮤니티 활동을 촉진하는 ‘연결과 사유의 방’ 프로그램의 운영을 시작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참여자 개개인들이 알아서 열매를 얻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 내부의 커뮤니티를 잘 형성하고, 타인과 소통하면서 인생에 대한 사유/경험/확장을 해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게 필수적이라고 봤다. 그저 친목이나 치유에 초점을 맞춘 커뮤니티가 아니라,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각자의 가치관을 재정립하는 해석과 정리의 커뮤니티로서 기능했다. 이는 실제로, 참여 청년들의 이탈률을 낮추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참여했던 청년들은, 한 명이라도 함께 들을 사람이 있을 경우와 없을 경우에 강의/프로그램의 참석률에서 차이를 보였다. 향초 만들기나 산책, 마피아 게임이나 밤새 이야기를 나누는 등 소박한 프로그램 일색이었던 캠프 이후, 참여 청년들은 '나만 고민하는 것이 아니구나'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고 말했다. 또 함께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청년인생설계학교 경험을 되돌아 보고 자신의 삶과 어떻게 이어질지 사유할 수 있었고, 이것이 몇몇 참여자가 프로그램의 단순 수혜자 또는 소비자 정체성을 내려놓고 참여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운영주체의 입장에서는 기호에 따라 쇼핑하듯 프로그램을 골라 듣는 참여자가 주체성이 높은 적극적 참여자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들은 결국 분절적으로 경험하고 원래 가지고 있던 인식에 맞추어 경험을 해석하기 때문에 마음이 열려 있지 않은 수동적 참여자다. 각 프로그램 사이의 연계성과 맥락을 읽어내려 노력하며, ‘나’에서 시작한 진로 고민을 ‘우리’ ‘청년들’ ‘한국 사람들’ 까지 점차 확장해 나가는 참여자들이 능동적 참여자고 적극적 참여자다. 청년들에게 갭이어를 지원하고자 한다면 청년들이 이러한 유형의 능동성을 체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는 풍성한 경험을 하게 만들어주는 것만큼이나 그 경험들을 연결짓고 사유하는 단계도 꼭 필요한 이유가 이것이다.
사이랩과 청년인생설계학교에서 청년들을 만나며 확신을 얻게 된 것은, 우리가 이야기해야 하는 갭이어는 직업을 찾기 위한 갭이어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한 갭이어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 번도 고민해본 적 없는 질문을 던지게 해주는 것,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 필요하고, 이런 경험을 스스로 해석하고 정리하면서, 자기 인생의 설계도를 그려볼 수 있게 도와야 한다. 다시 말해 청년 모두가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별 고민 없이 다른 사람의 언어로 자기를 설명해왔던 청년들이, 자기만의 언어로 자기를 정리하고 해석해내기 시작할 때가, 본질에 충실한 진로탐색과 진로설계를 시작했다는 신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