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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혜민 Jul 30. 2020

총을 든 여자

벌써 3년째다. 마리끌레르에서 “젠더 프리Gender Free” 특집 화보를 촬영하며 남성들이 해왔던 배역의 대사를 여성 배우들에게 연기하도록 하는 시도가. 나는 그 중에서도 첫 해에 촬영된 최희서 님의 연기를 두고 이야기해보려 한다. (풀버전 : 7인의 여성 배우들이 영화 속 남성 캐릭터를 연기하다)



비슷한 외국 사례로, W매거진에서 기획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 중 유명한 대사를 셀러브리티들이 연기한 영상이 있다.


“If you go, where shall I go, what shall I do?”
“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


원래 여성 배우가 하는 “당신이 가면 난 어디로 가야 해요, 무엇을 해야 하죠?” 라는 의존하는 듯 연약한 대사를 남성 배우들이 연기하게 하고, 남성 배우가 연기하는 “내 사랑, 솔직히 말해,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얘기네요.” 라는 피도 눈물도 없는 대사는 여성 배우가 연기하도록 했다. (특히 샤를리즈 테론의 연기가 끝내준다!)

이러한 성별의 벽을 넘어서는 시도가 큰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그만큼 평소의 “남성적” 배역과 “여성적” 배역 사이의 갭이 크다는 뜻일 것이다. 숱한 국내외 여성 배우들의 증언대로, 남성 배우에게 주어지는 배역의 수나 대사의 양은 여성 배우의 그것보다 훨씬 많다. 그리고 배역과 대사의 성격에는 더욱 큰 차이가 있다.


많은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남성 캐릭터를 수식하고 서포트하느라 본연의 성격을 제대로 보여줄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그러나 여성 캐릭터가 없어도 아무 문제 없는, 자기만의 존재감과 성격을 부여받는 남성 캐릭터는 무수히 많다. 마리끌레르에서 선택한 작품들의 캐릭터가 거의 그러하다. <신세계> <달콤한 인생> <연애의 목적> <올드보이> <베테랑> <햄릿> <동주> 라는 작품들에서, 남성 캐릭터들은 그들 자신으로 존재한다. 그들의 대사에는 힘이 실려 있다. 이유가 있는 말이고, 영향을 끼치는 말이다.


그 중에서도 앞서 첨부한 <동주>의 대사가 못내 기억에 남는다.

“동주야, 니는 시를 계속 쓰라. 총은 내가 들 거이니까.”


여성 배우들은 이러한 서사, 이러한 캐릭터, 이러한 대사를 받는 경우가 거의 없다. 벗이자 동료 시민이자 인생의 라이벌인 대상에게, 연정보다 더 뜨거운 우정을 표하며, 대의를 위하여 총을 드는 여성 캐릭터? 낯설기만 하다.


그 낯섦이 지겹다. 너무나 불공평하다. 왜 이러한 뜨거운 우정은 죄 남성들의 몫인가? 여성들의 연대와 우정이 “브런치 모임이 나라를 망친다” 는 식으로 폄하되는 동안 남성들의 우정은 세상을 구원한다. 역사 바탕 / 실화 바탕의 작품이라고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는데, 여성들이 1990년에 한꺼번에 외계에서 떨어진 게 아닌 이상 그 변명은 게으른 자기고백일 뿐이다.


그렇기에, 여성 배우들이 인터뷰마다에서 꼬집는 남성 영화인들의 이중적인 태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성으로는 다양성을 위해 여성 중심 영화가 필요하다면서 막상 자신에게 제안이 들어오면 받아들이지 못하는” (출처 : 임수정 인터뷰 / 씨네21) 그들이 상상할 수 있을까? 컴컴한 다다미방에서 (마찬가지로 여성인) 친우와 마주앉아, ‘너는 시를 계속 써라, 총은 내가 들겠다’ 라고 말하는 여성 독립운동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뛰는, 그런 캐릭터를 자기도 모르는 채 오랜 시간 동안 끝없이 갈망해왔던 여성 관객이 존재한다는 것을. 


ⓒ 영화 〈암살〉

나는 전지현이 안옥윤을 연기했다는 이유만으로 만듦새의 투미함에도 불구하고 <암살>을 가장 좋아하는 한국영화 중 하나로 꼽기도 했는데, 남성 캐릭터 아홉 명에 여성 캐릭터 하나로는 더 이상 만족할 수가 없다.


아름답고 가치로운 여성 중심 작품들이 점점 더 많이 만들어지고, 알려지고, 재조명받고 있는 지금, 창작자들의 과감한 결단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다.


끝으로 언제나 되풀이해 보면서 힘을 얻는 레이철 블룸의 수상 스피치를 첨부한다. 점프수트를 입고 연회장을 달려가는 모습에서 일차로 힘을 얻고, 함께 노미네이트 된 여성 배우들을 향한 감사의 말과 비춰지는 얼굴들을 보며 또 한 번 힘을 얻는다. 부디 멀지 않은 시일 내에 최대한 거창하고, 숭고하며, 엄숙하고, 위대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다수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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