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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혜민 Jul 30. 2020

대학 밖에서 배움을 경험하다

바꿈 '대학입시 공론장' 발제문 (2019.08.31.)

**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https://www.facebook.com/pg/changechange2020/) 에서 주최한 '대학입시 공론장' 에서 발제할 당시 작성했던 원고다. 대학 밖에서도 배움이 가능하다는 것을 골자로, 대학입시를 넘어선 상상을 자극하기 위한 목적의 발표를 준비했다.




안녕하세요. 오늘의 마지막 발제를 맡은 이혜민입니다. 저는 오늘 저 개인의 삶을 사례로 삼아 사례발표를 할 텐데요. 모든 사례발표가 그러하듯 이 사례는 아주 특정한 조건과 특정한 우연이 조합되어 만들어졌기 때문에 불특정다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여러분께서 제 사례를 날카로운 눈으로 봐주시고, 쓸만한 조각을 각자 조금씩 가져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 ” - 섬, 정현종


시 좋아하시는 분들은 공감하시겠지만, 시에는 읽는 사람의 마음이 비칩니다. 시를 읽는 내가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읽느냐에 따라 한 단어 한 단어가 다르게 해석되고, 다르게 기억됩니다. 저는 꽤 오랫동안 저 시의 1행만 기억하고, 굉장히 쓸쓸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일반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그 교실의 모습을 묘사할 때 ‘섬’이라는 단어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으로 진급하자마자, 시간표에서 국영수사과를 제외한 과목은 모두 자습으로 대체되었고, 둘씩 짝지어져 있던 책상은 하나씩 분리되었습니다. 너무나 자주 시험을 보기 때문에 매번 책상을 옮기는 대신 그냥 평소에도 시험 대형으로 놓기로 한 것인데, 고등학교 2학년과 3학년의 차이는 급식실 줄 순서밖에 없는 줄 알았던 저로서는 충격적인 광경이었습니다. 지금은 폭파되어 없는, 고등학교 생활을 관찰 기록해놓은 제 개인 블로그에 그 날에 대해 쓰며 저는 저 문장을 인용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런데 고3이 되고 보니 사람들이 모두 섬이다, 라고요. 


그때쯤이었습니다. 대학 입시가 우리를 어느 부분인가 망치고 있고, 내가 그것을 찾아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저는 함께 수험 공부를 하는 친구들을 인터뷰했습니다. 학교 자습실에서, 고3에게만 특별히 죽을 배식하는 아침의 급식실에서, 독서실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자정의 귀갓길에서, 야자 사이에 해장국을 먹는 조그만 일탈 사이에서... 대학 입시가 우리를 망치고 있다는 것은 일정 부분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걸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오만이었습니다. 지금의 대입 제도가 청소년들에게 비겁함과 패배의식을 가르치고 있다는 걸 제일 잘 아는 건, 당사자들이었습니다. 기회는 공정하지 않고, 선발 방식은 복잡하고, 준비 기간은 점점 더 많이 필요한 대학 입시가 친구들을 자발적 복종의 상태로 만드는 것을 보며 저는 대학에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대학 입학의 나이 제한이 몇 살인지 아시나요? 몇 살일까요? 


나이 제한은 없습니다. 얼마 전 조정되어 42세로 정해진 경찰대학을 제외하면요. 입학할 때 꼭 이십대 초반의 나이여야 한다는 조항을 가진 대학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저는 대학 입시에서 제가 주인공이 되는 것이 더 중요했고, 제가 몇 살에 신입생이 되는지는 덜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저를 수동적인 존재로 만드는 대입 과정을 중단하기로 한 것이지요. 아마 여러분은 대학 하면 4년제 종합대학을 떠올리실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2년제 대학도 있고, 사이버대도 있고, 특수목적을 갖는 대학도 있습니다. 배움이 목적이라면 하루 5시간씩만 자면서 아등바등 시험 공부를 해가지고 대학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목적이겠나요? (침묵) 네, 저는 진정한 배움은 대학에 있지 않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고, 다른 길을 탐구해 보기로 했습니다.


대학의 본래 목적에서 유리된 대학이 많아지면서, 입시의 본래 목적과 상관없는 입시제도가 우후죽순 쏟아져 나왔습니다. 공부만 하기에도 바쁜데 입시제도의 트랜스포머를 공부하는 것까지 더해져 수험생들은 매일 괴롭습니다. 학생이 주인공이 된다면 그런 제도가 가능할 리 없습니다. 더 큰 기업에 더 많은 학생들을 보내기 위해 혈안이 된 사립대학들의 경쟁이 지금의 기형적인 대입 풍토를 만들어냈고, 지금의 청소년들은 자기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 궤도에 끌려들어와 있습니다. 이들은 궤도를 따라 도는 것이 아닌 인생을 모릅니다. 



이러한 젊은 청소년과 청년의 삶을 제 경험을 통해 돕고 싶었던 저는, 대학 밖에서도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을 만들기 위해 청년 교육 공동체를 상상했습니다. 그것이 제 소개로써 말씀드린 사이랩이라는 조직으로 이어졌습니다. 사이랩은 청년들이 스스로 진로를 찾기 위한 활동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곳입니다. 대안교육의 실천을 20여년간 해 온 민들레라는 단체에서 인큐베이팅했고, 지금도 민들레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갭이어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습니다. 온갖 미디어와 주변 커뮤니티가 대학의 중요성을 부르짖는 와중에는 당연히 대학 밖 궤도 밖 삶을 시도하기 어렵습니다. 그럴 때 갭이어는 좋은 대안입니다.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기간을 자신을 위해 쓰면서 미래를 설계해 나가는 데 도움을 받습니다. 저는 제가 갭이어를 길게 보낸 케이스라고 생각하고, 그 시기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스승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존경할 만한 스승을 찾고, 만나고, 따라다닌 그 시기가 지금의 저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러한 갭이어를 서울시에서 정책화 시킨 것이 작년부터 진행된 청년인생설계학교인데, 그곳에 참여한 청년들은 모두 말합니다. 그동안 내가 어떤 사람인지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고. 대학 입시가 자기 탐색보다, 인간관계보다, 건강보다 우월한 가치로 취급받는 사회는 결코 훌륭한 사회일 수 없을 것입니다. 


궤도를 따라 도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가 주인이 되는 선택으로 이십대를 시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오늘 이 자리처럼, 대학과 대학 입시제도의 본질을 고민하는 당사자들이 모이는 자리가 많아야겠죠. 저는 스스로를 섬이라 칭하며 청승을 떠는 것으로 그 시기를 보냈습니다. 


지금의 청소년 세대는 [그 섬에 가고 싶다] 라는 문장에 담긴 주체성을 한껏 발휘하며 그 시기를 보내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사회에서도 다른 길을 탐색하는 청년 청소년 당사자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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