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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혜민 Jul 30. 2020

여자 아이돌이 여자 아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

Mnet 〈퀸덤〉 최종화의 'Lion' 무대, 그리고 케이팝



케이팝을 좋아하는 내내,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괴롭히는 하나의 질문이 있다. 여자 아이돌을 ‘좋아하는’ 방식이 과연 현실의 젊은 여성들에게, 그리고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어떠한 악영향을 끼치게 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전 세계 어디에나 가수들은 있고 그 가수들이 어리고 이상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을 때 더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것은 내 소관 밖의 일이다. 


그러나 케이팝은 지난 30여년간 너무 많은 어린이/청소년들을 빨아들였고, 그들이 모두 어리고 예쁘고 말라야 한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다양한 외모와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운과 실력을 통해 들쭉날쭉하게 성공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지 않았고, 단 하나의 이상적 모델을 정해두고 얼마만큼 그에 걸맞는지 여부를 먼저 평가하게 했다. 

그 모델을 정하는 과정에 당사자들의 신체 건강과 정신적 성숙이 고려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소년들에게보다 소녀들에게 더 엄혹하고 잔인하게 높은 기준을 요구했다. 남자 아이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저체중이 될 필요가 없다. 배꼽을 드러내는 의상을 입지 않아도 된다. 머리카락이나 입술 색깔을 지적받지 않는다. 여자 아이돌이 되고 싶은 사람은 남자 아이돌의 조건에다 추가로 수십 가지의 조건을 충족해야 하고 이는 대부분이 외모/꾸밈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는 내가 그들의 외모를 칭찬하는 것, (그들이 그 외모를 가지고 있어야만 입을 수 있는) 의상을 좋아하는 것, (그들이 아침잠을 넉넉히 잔다면 출연할 수 없는) 음악방송에 더 자주 나오기를 바라는 것, 다시 말해 내가 그들을 좋아하는 일 자체가 현 상황을 계속 지속하는 동력이 된다. 미디어를 통해 사회가 바라는 ‘여성상’을 습득하는 수많은 여성들이 다이어트와 꾸밈노동에 죽도록 시달리는 이 상황을, 내 손으로 계속해서 유지시키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허탈함을 느끼고 팬 활동을 그만둔 사람도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잠 못 드는 밤을 지나고, 내가 도달한 결론은 이러하다. 여자 아이돌이 여자 아이들을 도울 날이 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날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탈덕’은 답이 아니다. ‘케이팝이 망하는 것’, 또는 여자 아이돌들의 활동을 중단시키는 것 역시 해답이 아니다. 

왜냐하면, 슬프게도 여자 아이돌의 수와 영향력은 남자 아이돌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으며, 지금 조금이라도 파급력을 지닌 여자 아이돌들, 그리고 여자 아이돌의 여성 팬들을 멈추게 만들면 업계는 순식간에 남성들의 시선에 맞춘 컨텐츠로 가득 찰 것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내적 모순을 겪더라도, 우리는 여성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컨텐츠가 시장에 계속 존재할 수 있도록 지켜내야 할 책임이 있다. 그 컨텐츠가 더 훌륭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향유할 문화는 우리가 사는 사회를 마땅히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바뀌면 문화도 바뀌어야 하는 것이 당연할 뿐더러, 문화가 바뀌는 것이 사회를 바꾸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남성적’ 리더들은 틈만 나면 여성들의 성과를 깎아내리고,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존재를 지워버린다. 

최근에는 더욱 질 나쁜 방법을 택하는데, (여성들을 아예 배제시킬 수 없으니) 실질적이고 핵심적인 내용은 모두 다수의 남성이 리드하고 들러리로 소수의 여성을 세워 면피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갈수록 교묘해지는 백래시는 지지세력이 없으면 뚫기 어렵다. 

앞에 쓴 엄혹한 기준을 뚫고 여성 ‘아이돌’로 데뷔한 사람들에게 창작자로서의 야망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지지세력이 필요하다. 여자 아이돌을 ‘좋아하는’ 일이, 그들의 외적 상태를 응원하는 데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그들의 내적 각성과 창작열을 지지하고 지켜내는 데까지 간다면, 어쩌면 사회의 후진이 아니라 전진을 돕는 일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 Mnet 〈퀸덤〉 최종화


여기까지 도착한 나에게, (여자)아이들의 ‘LION’ 무대는 큰 의미가 있다. 나의 연약하고 무른 결심들을 이 무대의 한 순간 한 순간이 굳혀 주었다. 무대가 시작하기 전 인트로 영상부터가 시작이었다. 오랫동안 ‘King’과 함께 호명되었던 남성형 명사(암사자를 따로 이르는 말로 lioness가 있다) ‘Lion’이 여자를 수식하게 되는 순간을 그린 짧은 애니메이션… 영화적 연출도 내레이션 내용도 목소리도 모두 기가 막혔다. 

그리고 가장 여린 목소리를 가졌던 슈화가 주인공으로 나선 오프닝 시퀀스, 자기 손으로 자기 왕관을 쓰는 민니의 일성(一聲), 꼰대들의 의심을 뚫고 받는 박수가 제일 짜릿하다고 선언하는 소연의 눈빛 모두, 더 이상 만만한 여자 아이로 남지 않겠다는 독립선언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야기의 결말, 어둠 속에서 뒤쫓아오는 경쟁자들은 계단을 채 올라오지 못하고 머리를 숙인다. “I’m a lion / I’m a queen / 아무도 / 그래 길들일 수 없어 / 사랑도” 라는 가사와 함께다. 이 무대가 의미하는 바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바보다. 

그럼에도 (여자)아이들 멤버들은 너무 말랐다. 너무 예쁘고 너무 어리다. ‘여자 아이돌’에게 요구되는 수없이 많은 금기들을 줄줄이 매달고 있다. 그러나 자기 머리로 자기 손으로 이러한 내용을 만들어내고 연기하는 사람들이 과연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 없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이 무대가 멤버들의 창작이라는 근거는 (여자)아이들을 인터뷰한 GQ 매거진을 보면 충분히 설명된다. 특히 전소연이 설명한 ‘LION’ 무대에서의 슈화 역할이 인상깊다. “소녀가 왕좌에 오르는 내레이션은 제가 쓴 건데, 슈화가 딱이었죠. (…) <퀸덤>에서 한 명, 한 명 무대마다 돋보이는 파트를 만들었어요. (…) ‘LION’은 슈화를 줄 차례였고, 그 무대에 가장 어울렸죠. 할 수 있는 친구란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우리 멤버들은 다 이렇다.” 전소연을 비롯한 멤버들은 모두 무대 하나, 수록곡 하나의 프로듀싱에까지 참여한다.) 


나는 그들이 자기 자신을 믿듯, 나 자신을 믿는다. 그리고 수없이 쏟아지는 컨텐츠들 중에서 이런 것들만 쏙쏙 잘 골라 취사선택할 만한 안목이 있는 미래 세대의 여성들을 믿는다. 이런 컨텐츠가 더 많아질 수 있도록, 나는 기꺼이 뒤로는 닥쳐오는 백래시를 막고, 앞으로는 여성 아이돌을 인간으로서 창작자로서 대하게끔 분위기를 조장하는 데 총력을 쏟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인간 방파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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