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Writing Contest의 교훈
대학 시절, 교양 과목으로 ‘현대철학의 이해’를 들었다. 철학과 임모 교수였고, 그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강의 중 자주 언급했다.
교재는 난해한 문장으로 가득했고, 그 문장을 풀어준다는 교수의 강의는 오히려 더 난해했다. 분명히 우리말로 강의하고 있는데, 나에게는 온통 외계어 같았다.
그 시절엔 또 ‘담론’이라는 단어가 유행이었다. 영어로는 discourse다. 그 뿌리는 라틴어 discursus인데, 원래 뜻은 ‘이리저리 달리다’였다. 중세 프랑스어 discours를 거쳐 영어로 들어오면서 ‘이야기, 연설, 논의’ 같은 의미가 붙었다.
우리는 당시 미셀 푸코에 열광했는데, 푸코가 말한 discourse는 그냥 말이나 토론이 아니라, 그 말과 토론이 어떤 규칙과 권력 구조 속에서 만들어지는 가를 의미했다. 사회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다는 것에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문제는, 원래 뜻을 몰라도 다들 멋있게 보이려고 담론을 마구 썼다는 거다. 세미나, 학술대회, 동아리 모임, 심지어 카페 수다 속에서도 담론, 담론, 담론…
‘페미니즘 담론’, ‘민족 담론’, ‘저항 담론’… 담론이 낀 단어만 던지면 갑자기 화제는 거대해졌고, 대단한 얘기가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구체적인 내용은 없고, 그럴듯한 포장만 가득했다.‘담론’은 어려운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마법의 가루였고 한마디로 허세였다. 그놈의 담론은 문제를 논의하고 해결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미로였기에 담론 속에서 이리저리 달릴수록 exit에서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현대철학의 이해’ 강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담론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강의는 더 복잡해졌고,
그 순간부터 교수도, 학생도, 교재도 다 안갯속으로 들어갔다.
그 속에서 이십 대 초반의 나는 세상을 이해하는 내 능력이 참으로 변변찮다는 자괴감을 느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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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세상엔 이런 난해함을 ‘풍자’하는 상이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뉴질랜드 철학자 데니스 더튼(Denis Dutton)은 “Bad Writing Contest”(최악의 학술문장 경연대회)를 운영했다.
이 대회는 실제로 출판된 학술서나 논문 중에서,
•불필요하게 긴 문장
•전문용어와 추상어 범벅
•독자가 이해하기 힘든 문장 구조
를 가진 문장을 뽑아 ‘수상’하게 만든다.
대표적인 예를 보자. 1998년도의 우승작은 저명 비평가 주디스 버틀러가 쓴 글이다.
원문
“The move from a structuralist account in which capital is understood to structure social relations in relatively homologous ways to a view of hegemony in which power relations are subject to repetition, convergence, and rearticulation brought the question of temporality into the thinking of structure, and marked a shift from a form of Althusserian theory that takes structural totalities as theoretical objects to one in which the insights into the contingent possibility of structure inaugurate a renewed conception of hegemony as bound up with the contingent sites and strategies of the rearticulation of power.”
번역
“자본이 사회적 관계를 비교적 동질적으로 구조화한다고 보는 구조주의에서, 권력관계가 반복·수렴·재규정된다고 보는 헤게모니 관점으로의 이동은 구조에 대한 사고 속에 일시성의 문제를 끌어들였고, 구조적 총체를 이론적 대상으로 삼는 알튀세르 이론에서, 구조의 우발적 가능성에 대한 통찰이 권력 재규정의 우발적 장과 전략에 결합된 새로운 헤게모니 개념을 여는 전환을 표시했다.”
가공할 문장이다.
94 단어짜리 초장문이다. 주어와 술어가 멀리 떨어져 있고, 개념의 폭격으로 시작해 융단 폭격으로 끝난다. 당연히 한 번에 읽기 힘들다. 가장 큰 문제는 읽고 또 읽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추상적인 단어들을 이어 붙여서 더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 문장은 어찌 보면 작가 버틀러의 능력인 것인가?
나는 이제야 일갈하련다. 이건 독자에 대한 기만이다. (쓰**라는 단어가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저명한 분이니, 참는다.)
내친김에 1996년도의 우승작도 보고 가자. 영국의 철학자 로이 바스카다.
원문
“Indeed dialectical critical realism may be seen under the aspect of Foucauldian strategic reversal — of the unholy trinity of Parmenidean/Platonic/Aristotelean provenance; of the Cartesian-Lockean-Humean-Kantian paradigm, of foundationalisms (in practice, fideistic foundationalisms) and irrationalisms (in practice, capricious exercises of the will-to-power or some other ideologically and/or psycho-somatically buried source) new and old alike; …” Roy Bhaskar
번역
“실로, 변증법적 비판적 실재론은 푸코적 전략적 전도라는 측면에서 볼 수 있다 — 파르메니데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에 뿌리를 둔 불경스러운 삼위일체, 데카르트·로크·흄·칸트의 패러다임, (실제로는 신앙주의적 근본주의인) 각종 근본주의들, (실제로는 권력 의지의 변덕스러운 행사나 어떤 잠재된 원천인) 다양한 비이성주의들,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 …”
철학이 어렵다고 해서 반드시 이렇게 써야 하는 건 아니다.
글이 난해해질수록 학문적 권위가 높아진다는 착각이 학계에는 존재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자기들끼리는 그냥 이렇게 쓰더라도 서로가 적당히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인데, 독자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는 것이다.
데니스 더튼은 말했다.
“명료성은 단순함이 아니라, 복잡한 생각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이다.”
좋은 글은 읽는 사람에게 ‘아, 알겠다’는 순간을 주고, 나쁜 글은 ‘이게 무슨 말이야?’라는 의문만 남긴다.
브런치에도 매일 수많은 글이 올라온다.
내 글쓰기의 원칙은 단 하나다.
“최대한 명료하게, 그리고 단문으로 쓴다.”
폼 잡고 어렵게 쓰는 건 하수다.
한 번만 읽어도 이해되는 글이, 정말 좋은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