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말은 많으나 뜻은 흐려진 시대

100회 차 글

by 스티뷴

파이낸셜 타임즈(Financial Times)에 필리타 클라크(Pilita Clark) 칼럼니스트가 있다. Business Life 섹션을 정기적으로 쓴다.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이 돋보이는 글이 많아 애독한다. 연차가 오래되었고, 꼬장꼬장한 면이 있다.


어제는 "around"라는 단어를 들고 나와서 지면에 대고 일갈했다. 클라크는 정치인, 전문가, 기관들이 "around", "piece", "space", "reaching out", "curate"와 같은 단어를 남발하여 본래의 의미를 희석시키고 명확함 대신 모호함을 키우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 예다. BBC 라디오의 아침방송에서 클라크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진행자의 멘트가 있었다. "The Today programme invites a series of guest editors to make an episode of Today with us around things that they are most interested in."


이게 뭐 어때서? 뜻이 안 통하는 것도 아니고, 생트집 잡지 말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클라크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인다. "about"이나 "on"처럼 명확한 표현이 있는데, "around" 같은 애매한 표현을 계속 쓰다 보면 구체적인 내용을 회피할 여지를 준다는 것이다. 그럴듯하게 들릴지 몰라도 실질적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진다는 비판이다.


비판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piece"와 "space"와 같은 단어까지 확장된다. 이런 말들이 요즘 들어 부쩍 많이 쓰인다고 지적한다. 클라크는 이 단어들이 "industry"(산업)나 "sector"(분야)처럼 더 정확한 단어들을 대체할 때 특히나 분노한다.


그녀는 칼럼에서 이렇게 떠들어봐야 "이 싸움은 희망이 없다"라고 인정하면서도, 언어를 분별력 있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 강조한다. 특히 가짜 뉴스와 분열이 만연한 세상에서 언어는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게으른 표현 습관을 버리고, 명료성을 우선시하라는 요청이다.


칼럼의 마지막 지적은 새겨들을만하다. 이러한 언어 습관이 나이 많은 결정권자들을 짜증 나게 할 수 있으며, 결국 본인들의 경력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경고다. (그런데, 사실 그 나이 많은 결정권자들이 그런 전략적 모호함을 더 선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미국 로스쿨에 입학했을 때, 민사소송법의 대가인 Richard Freer 교수님의 강의가 내 첫 수업이었다. 교수님 말씀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게, 앞으로 in order to가 답안지에 보이면 감점이라는 것이었다. to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은 많다. 대표적인 것이 "등"이다. 너무나 자주 쓰고 있어 "등"에 감추어진 것이 등 앞의 것보다 더 많을 지경이다.


말은 많아지고 있지만 그 뜻은 흐려지고 있는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의 귀스타브 플로베르도 말하지 않았나? 일물일어설. 즉, 하나의 사물을 표현하는 데는 단 하나의 단어만 적합하다는 말이다.


이번으로 100회 차 브런치 글이다. 2년 전 시작한 글쓰기인데, 여기까지 왔다. 어떤 글은 메인에 올라 이틀 만에 조회수 2만을 넘게 찍기도 했다. 내가 모르는 이와 소통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나는 브런치 글을 쓰고 퇴고를 여러 번 하지는 않는다. 다만, 집중해서 쓰는 편이며, 가능하면 적확한 말을 건져 올리려 애쓰는 편이다. 그것이 명료하면서도 아름다운 언어면 더 좋겠다. 어려운 일이다. 클라크의 칼럼을 보며 새삼 계속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듄 2 보러 갔다가 다툰 아빠와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