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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파파야 향기 May 08. 2022

효녀는 아니지만 효도가 뭐 별건가요?

#저는 효녀가 아닙니다


거실에서 엄마가 궁시렁궁시렁 하는 소리가 구석진 내 방까지 들려온다.


아이고.. 무슨 잠을 저리 자나 몰라.
해가 중천인데... 
텔레비전도 재미없고....


밤새도록 뭘 했는지 남는 것도 없이 날이 샜다. 할 수 없이 새벽녘에 잠들었는데 계속 잠결에 이상한 소리가 나서 눈을 떴더니 벌써 점심때가 됐다. 부스스하게 하품하고 나오는 나를 향해 엄마의 앙칼진 잔소리가 날아왔다. 


엄마: 남들은 저렇게 산으로 들로 여행을 가는데 우리 집 딸은 점심때가 되도록 잠만 자요.
나: 어제 시험문제 내느라 밤샜어. 왜? 무슨 일 있어?
엄마: 일은 무슨 일. 늙은 엄마는 밥도 안 먹고 이렇게 있는데 딸은 점심때가 되도록 밥도 안 주고 잠만 자니까 그렇지? 남들은 저렇게 다들 효도하는데....
나: 아이고 엄마... 저는 효녀가 아닙니다. (한숨을 한 번 쉬고...) 아이고 그럼, 깨우지 그랬어?
엄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피곤해서 자고 있는데 어떻게 깨워!
나: (화를 내려다가 참으며) 그랬구나. 그래서 화가 났구나....


예전 같으면 또 잔소리를 한다며 엄마랑 으르렁거렸을 텐데 그냥 배시시 웃으며 엄마를 달래 드렸다. 작년에 남동생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나서 엄마는 이상하게 나에게 의존적이 되셨다. 작년만 해도 나에게 설거지 청소 등 집안일을 하나도 시키지 않으셨는데 어느 순간부터 엄마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려고 한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내가 하려고 노력한다. 예전 같으면 화를 냈을 일들도 참고 엄마를 다독이고 있다. 나이 50이 넘어 이제 철이 든 건지... 아니면 여력이 없는 건지... 1년 전과 비교해 보면 엄마에 대해 관대해진 건 사실이다. 이젠 웬만하면 싸우지 않고 그냥 이해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엄마의 편협하고 꽉 막힌 생각과 말들은 여전히 나를 화나게 한다. 오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계속한다. 마치 치매 노인이 말하는 것처럼... 혹시 하는 의심도 들지만 또 멀쩡하게 상황에 맞게 말해서 지금은 엄마를 주시하고 있을 뿐이다.


한 번은 내가 보건소에 가서 검사를 받으면 어떨까 했다가 노발대발 화를 내셔서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엄마에게 치매검사라는 말이 이렇게 민감한 이야기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그래서 검사의 '검'자만 말해도 엄마는 역정을 내신다. 걱정이 되긴 하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고 엄마가 스스로 검사를 받으러 가자 하실 때까지 기다리겠지만 가능하면 빨리 기회를 만들어 검사를 받아봐야 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지금은 마음 편하게 지내시도록 하는 게 좋을 듯하다. 아들은 보낸 지 이제 겨우 1년밖에 안 됐으니까...


#늙으신 엄마의 뒷모습은 참 짠하네요.


엄마를 위해 점심을 준비하고 식사한 후 남은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엄마가 슬그머니 나에게 오시더니 그렇게 오래 앉아 있으면 허리 아프지 않냐며 산책하러 같이 가자고 하신다. 내가 그렇게 걸어야 한다고 같이 걷자고 해도 한 번도 같이 걸은 적이 없으신 분이 오늘 웬일로 같이 걷자고 하시는지 몰라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이렇게 먼저 걷자 하시는 일이 드물어 살짝 당황했지만 엄마가 정말 나가고 싶으신 것 같아 하던 일을 던져두고 잽싸게 모시고 집 밖으로 나왔다.


확실히 집에만 계셔서 그런지 잘 걷지를 못하셨다. 가다 쉬고 거친 숨을 쉬면서 아파트 뒤에 있는 개웅산에 올라갔다. 어버이 날을 맞이하여 어딘가를 가는 사람들이 부러웠던 것인지 아니면 그냥 어디든 나가고 싶으셨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나와서 걸으니 좋으셨나 보다. 힘드셔도 그냥 집에 가자 하지 않고 계속 내 뒤를 따라오셨다. 보통 때 같으면 어딜 가냐며 그냥 집에 간다 하셨을 텐데... 다행이었다.

엄마의 걸음걸이도 처음보다 좋아지고 목표로 했던 1바퀴뿐만 아니라 정상까지 가자고 하셨다. 소풍 나온 것처럼 사진도 찍고 풍경도 감상하다 보니 낮은 산 정상까지 오게 되었다. 


연휴를 맞아 많은 사람들이 걷기도 하고 운동도 하고 있었다. 역시 초록 초록한 자연은 지치고 힘든 우리를 위로해 주고 기운을 돋게 한다. 오랜만에 뒷산에 올라오신 엄마는 많이 변한 뒷산이 꽤나 마음에 드셨는지 다음에도 또 오자고 하신다. 차를 타고 멀리 나들이는 못 갔지만 여느 공원 못지않게 잘 만들어진 뒷산 산책로를 걷고 오니 여행 다녀온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 효도가 뭐 별건가요?


사실 어버이날을 맞아 지난주에 동생들과 다 모여 식사도 하고 용돈 드렸다. 그리고 오늘은 각자 다들 바빠서 내일 식사하기로 했으면서도 아침부터 늘어져 자고 있는 늙은 딸이 마음에 안 드셨나 보다. 연휴라고 다들 저렇게 가족단위로 어딘가를 가는데 혼자서 텔레비전 앞에 누워있는 자신이 싫으셨는지 나가자 하셨던 것 같다. 


집에 돌아오셔서 아까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계속 돌려 보시고 계신다. 내가 찍어드린 사진인데도 마음에 드는 사진과 동영상을 나의 눈앞에 들이대시며 계속 한 번만 보라고 잘 나오지 않았냐며 관심의 표현을 재촉하신다. 그 모습을 보니 효도가 뭐 별 건가 싶다. 비싼 선물도 맛있는 밥 한 끼도 아닌데 오늘 산에 다녀온 것이 좋으셨는지 동생들에게 자랑하신다. 오늘 함께 산책한 일과 사진들을 몇 시간 째 보시는 걸 보니 짠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앞으로 엄마가 지금보다도 더 늙어지시면 어떻게 돌봐 드려야 할지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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