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겁쟁이 공작새 Jan 18. 2021

순대국밥과 빈티지

꾸덕꾸덕한 디테일의 미학

예전부터 요즘 같이 눈 내리는 추운 날에는 제의의식처럼 꼭 하는 일이 있다.

바로 순대국밥을 먹는 것이다.

뜨끈한 국물이 차게 식은 몸을 데워주는 그 느낌이 좋기도했지만, 무엇보다도 집 근처 순대국집의 국물과 건더기 양이 장난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집은 건더기도 푸짐하게 줄 뿐더러, 무엇보다 국물의 진함이 장난 아니었다. 돼지 누린내가 은은하게 풍겨오는 그 진하디 진한 아이보리 빛 국물.

우리 집에서 하숙하던 사촌동생은 '너무 아재입맛이다', '냄새난다'며 싫어했지만, 초등학생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그 집에 다녔던 내겐 언제나 한결 같은 근본 넘치는 순댓국이었다.

그렇게, 약 15년 넘게 다닌 단골집의 맛은 어느새 내게 일종의 '순댓국의 이데아'처럼 인식되었다.

너무나 당연했던 일상이었던지라 사진이 남은 게 없지만, 대충 이런 느낌의 비주얼이었다.진하고 꾸덕한.

문제는 그 집이 재작년에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아마 주인 어르신들 나이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단골집을 잃어버린 나와 아버지는 별 수 없이 집 근처 다른 순대국 집들을 다녀야 했다. 반년도 안 돼서였을까. 우리는 더 이상 순대국을 먹지 않게 되었다.

다른 순댓국들이 맛이 없던 것은 아니다. 인테리어는 원래 단골집에 비하면 훨씬 깔끔했고, 위생도 더 나아보였다. 반찬들은 정갈했고, 가장 중요한 순댓국은 깔끔하게 뽀얀 국물에 예쁘게 잘린 순대들이 들어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너무 깔끔한 국물. 돼지 누린내를 완벽히 잡아낸 게 우리 부자의 입맛엔 도저히 들어맞지 않은 것이다. 어디를 가도 깔끔한 맛, 달리 말해 '프랜차이즈화된 맛'의 순댓국밖에 없었고, 은은한 돼지누린내의 맛을 즐기던 우리는 결국 포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회사를 들어와 음식을 본격적으로 시켜먹기 시작하면서 깨달았다(원래 배달음식은 잘 안 먹는 편이다). 사람들은 깔끔한 순대국밥을 더 선호한다는 것을.

회사 막내가 나다보니 대체로 점심을 내가 주문하는 편인데, 요즘처럼 추운 날엔 순댓국이 땡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배달의 민족으로 평점 높은 국밥집을 리뷰를 보면 '국물이 깔끔해서 맛있어요', '누린내가 안 나서 좋아요' 라는 리뷰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키면 회사 사람들도 적당히 맛있게 먹는다. 만족을 못하는 건 나뿐.

깔끔히 맑은 순댓국은 역시 뭔가 아쉽다

남들은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지만, 나는 돼지누린내 은은히 풍기는 옛날식의 순댓국이 좋다. 나에겐 그것이 순댓국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새하얀 사골국의 깔끔함도 가끔씩은 좋긴 하지만, 쿰쿰한 냄새의 풍부한 '디테일'과 비교하면 역시 부족하다.


'근본''디테일'. 내가 아날로그와 빈티지를 좋아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나는 볼펜보다는 만년필과 연필을 좋아한다. 딸깍, 쓰윽으로 끝나는 볼펜은 분명 편하다. 하지만 닙(만년필 촉)과 피드(만년필 내부)를 관리 해야하고 종이 위로 천천히 퍼져나가는 잉크의 번짐을 볼 수 있는 만년필과, 커터칼로 매번 심을 깎아야 하고 종이 위에 마찰로 사각사각 거리는 연필의 감성은 깔끔함과 편함,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100년 넘게 사람들이 써왔다는 '근본'과 관리와 사각거림이라는 '디테일'이 사람을 홀리는 것이다.


빈티지 옷들에 빠진 이유도 역시 현대 패션을 낳은 '근본'과 그 시절의 옷들에서만 볼 수 있는, 지금으로 보면 아무런 기능도 안 하는, 투머치하다고도 볼 수 있는 '디테일' 때문이다.

가령 요새 가장 뽐뿌가 들어간 M65 야상 같은 경우를 보자. 올해 20대들에게 꽤 유행한 '개파카' 디자인의 '근본'이며, 군복 위에 입어야 했기에 지나치게 큰 오버핏에다 외피와 내피가 따로 있는 불편한 '디테일'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오버핏은 오버핏대로의 멋이 있으며, 안쪽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내피는 '갬성'이 된다. 세월에 따라 멋드러진 물빠짐이 생기는데 그건 그것대로의 멋이 있다.

미니멀도 깔끔한 게 예쁘긴 하지만, 역시 세월따라 얼룩과 물빠짐이 그대로 남는 빈티지에 눈과 마음이 간다. 왼쪽은 코스, 오른쪽은 M65 피쉬테일

밀리터리뿐만이 아니다. 면 100%로 된 빈티지 옷들도 좋아하는 편이다. 청바지나, 코튼트윌 소재의 옷들. 그런 옷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색이 빠지며 세월의 멋이 얹어진다. 비록 이염이나 낡아보인다는 불편함이 있지만 그런 불편함도 나름 나름 '갬성'의 한 가닥이다.   


오랜 세월 내려온 근본은 대체로 깔끔함과는 거리가 먼 꾸덕꾸덕한 디테일을 가지고 있다. 분명 편하거나 대중적으로 멋진 것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옛것, 오래된 것, 근본의 것들은 주름마다, 흠집마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래, 마치 '인간 냄새'를 풀풀 풍긴다고 할 수 있다. 오래된 순댓국집은 좀 더러울지는 몰라도 나이 지긋한 주인의 푸짐한 인심이 함께한다. 만년필은 관리는 귀찮지만 쓰면 쓸 수록 닙이 나와 함께 맞쳐져 간다. 빈티지 제품들은 이전 주인들이 입어온 흔적을 주름처럼 몸에 새기고 있다.


 오래됐기에, 이것저것 걸거치는 것이 많기에, '인간냄새'는 정겹고 멋스러운 대신 불편함을 동반한다.

이는 물건 뿐 아니라 인간관계에도 마찬가지다. 혹 이 글을 읽는 당신이 20대 후반 이상이라면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라. 그 때만 해도 이웃과 터놓고 지내며 왕래가 잦았다. 수천년을 이어온 '근본'의 인간 관계, 깔끔한 관계보다는 서로 오지랖을 부리는 불편한 '인간 냄새' 나는 관계였다. 불편함이 많았기에 정겨웠고, 깔끔하지 않았기에 탈이 많디테일이 넘쳐났다 

아주 오랜 기억의 편린으로밖에 안 남았지만, 아직도 가끔 그때 그 시절 관계의 디테일들이 그리워지곤 한다.

이웃집 아주머니 집에서 밥을 먹고, 이웃집 누나와 놀이터를 가고, 이웃집 아저씨가 우리집에 놀러오던 그때의 그 꾸덕꾸덕한 '인간냄새'가.


하지만 나도 안다. 쇠퇴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쿠리한 순댓국은 더이상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도 냄새가 현대적이지 못해서겠지. 만년필과 연필은 볼펜에 비하면 경제적으로도 실용적으로도 현격히 뒤떨어진다. 빈티지를 모티브로 한 브랜드들은 오리지날 제품에 달려있는 자잘한 디테일들까지 복각하다보니 가격이 치솟는다. 다시 말해, 생산성이 좋지 않다.


인간냄새도 그렇다. 개인주의화되는 현대에 있어 '인간냄새'란 옆집의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할 뿐이며, 혹여 무슨 일로 말을 걸어와도 회사일로 바쁜 현대인에겐 귀찮은 오지랖에 불과하다. 원치 않는 상황에 풍겨오는 인간 냄새는 '깔끔하게' 사라져야 할 악취가 되어버린다. 현대의 관계는 맑은 순댓국처럼, 더이상 잡다한 디테일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중요한 건 깔끔함과 '순댓국스러움' 사이의 적당함이겠지만, '적당'이란 말만큼 모호하면서 어려운 게 없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반발력으로 반대편으로 다시 튀어나가고, 다시 또 반대편으로...

그런 변증법 위에서 '언젠간 적당함에 이르겠지'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사는 수밖에

 



다시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다. 이번 주에도 나는 아마 한번은 순댓국을 배달시킬 것이다. 이전과 다른 곳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곳을 찾아나가겠지. 예전에는 어느 순댓국집을 가도 풍기던 그 쿰쿰한 근본, 디테일을 찾아서.


매거진의 이전글 이야기 울렁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