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만난 학원가들
요 근래 특이할 점은,
이 동네를 오다가다 수십 년 전에 친했었던 친구들을 만난다는 것이다.
지난 주에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아이를,
이번 주에는 대학 때 연합동아리에서 만나 친해졌었던 친구를.
그리고 오늘은 큰 애를 낳고 바로 입소했던 산후 조리원에서 당시 꽤나 수년간 연락하고 지낼 정도로 친했었던 엄마를.,
이제와 우연찮게 다시 만나게 된 이들은 당시에 코드가 맞는 절친들이었음에도 가는 길이 달라지면서 연락이 끊어졌던 아쉬운 인연들이었다.
세월의 무상함을 알리듯 수십 년이라는 시간을 지내오면서, 그녀들이나 나나 모두 외형적으로 변해 버린 모습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아! 지난 때엔 이런 소중한 인연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던 추억이 있었구나!’를 상기시키며 새침한 태도로 세월의 무상함을 가벼이 흘려 버리는 수 밖에.
의도치 않게 만나지는 장소는 참 한결같은 곳이다.
바로 여기 대치동에서 요즘 매일 같이 이어지는 학원 설명회.
역시 전국 각지에서 죄다 귀신 같이 알고 모여드는 곳이 맞기는 맞나 보다. (졸지에 나는 소중한 옛 인연들의 연락처를 교환하고, ‘사람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지난 10월 중순 ‘2028 대입개편안’ 시안이 발표 되면서, 이 곳 대치동 학원가는 물만난 고기들 처럼 하루가 멀다하고 계속해서 설명회를 이어가고 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긴급상황’이라 자초하면서, 시안 발표 당일에는 밤 10시가 넘어가더라도 온라인, 오프라인 개의치 않고 설명회를 시작하더니, 이제는 하루도 빠짐없이 수백 여 곳의 학원들이 제각각 자신들의 입결 성공을 위한 전략을 짜내어 학부모들을 불러내느라 여념이 없어 보인다.
역시 대치동은 대치동인 듯 싶다.
2028년도이면 앞으로 4-5년은 너끈히 지나야 시행될 것이고, 게다가 이것은 대략적인 시안이 아니던가 말이다.
분명, 시안이기 때문에 연말 확정 시책이 나오기 전까지 바뀌는 부분도 다분히 있어 뵈고, 또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제대로 된 성공 전략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 내 개인적인 소견이다.
하지만, 이 곳은 일명 그 유명한 ‘대치동 학원가’이기에 절대 뒤쳐질 수는 없으리라.
그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핵심을 짚어내 많은 아이들과 학부모를 자신의 학원으로 끌어 들여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이 어마무시한 약육강식의 학원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힘들 것임은 자명한 사실.
학원의 먹이사슬.
굉장히 무섭다.
이번 코로나를 기점으로 무섭게 치고 올라간 원톱 대형 학원의 경우, 수십 년간 명성을 이어왔던 누구나 알만한 전통있는 학원들을 삽시간에 집어 삼켜 버렸다.
새로이 등장한 이 다크호스는 하루가 멀다하고 대치동의 이 곳 저 곳에 건물을 세워 나가기 시작했는데, 그 기세가 정말 대단했다.
사탐 과탐의 변별력도 중요한 입결의 요소로 자리 매김한 이래로, 좋은 컨텐츠와 굉장한 인적자원(학원 선생들)을 유입하는 데에 돈을 아끼지 않았던 이 학원은 결국엔 이 곳 대치동에서 현재 자타공인 원톱이라 할 수 있겠다.
여느 경쟁 사회보다 더 치열하고 악랄한 학원 생태계.
여튼, 나 역시 우리 둘째가 새로운 대입 개편 시행이후 입시를 치뤄야하는 세대이므로 이러한 뜨거운 분위기에 휩쓸려 요즘 자주 학원 설명회를 찾아 가고 있었다.
반복하며 귀 따갑게 학원에서 말하고 있는 대입 개편안의 핵심을 요약해 보자면,
- 외고, 국제고, 인문계 학생도 의대, 이공계 진학가능
- 내신보다 수능 변별력이 상대적으로 크게 증가
- 내신 부담 큰 폭완화, 특목고, 자사고, 명문일반고 선호도 증가
- 의대, 이과 쏠림 심화(문과 상위권 학생들도 이과 지원 가세)
- 고교학점제 도입취지 무색, 결국 입시 유리한 과목에 집중(수강생수 많고, 수능과 연계과목)
- 대학에서 내신 변별력 약화로 현행 수시 선발 방식 큰 변화 예상, 수능최저 강화, 대학별 고사 등
- 수능 위주 조기 학습 가능성, 특히 수학, 과학(이과 쏠림)
- 미적분II+기하 등 심화 수학과목 수능이 실질적 문이과통합의 핵심 쟁점이 될 수도(대학에서 강력 요구), 대학에서 필수 지정시 문이과 통합은 사실상 원점
- 정시에서 당해년도 수능 난이도에 따른 과목간 유불리에 따라 문이과 선택에 상당한 혼란도 예상(점수 유불리에 따라 정시에서 문이과 상호 교차 지원 혼전 예상)
여러 가지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엔 우리 아이들이 해야할 내신과 수능, 그리고 좀 더 강화되어 디테일하게 써야할 세특 등등 해야할 것들이 더 늘어난 듯 싶다.
솔직히 한 편으로는 미국처럼 ’고교학점제‘내용을 운운하며, 우리 아이들도 선진국 교육처럼 본인이 원하는 진로를 제대로 찾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도 했었지만, 역시나! 어쩔 수 없이 겉만 번지르해 진 이번 시안으로 사실 실망이 컸다.
보이기에 내신이 5등급으로 완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분명 우수한 아이들을 따로 선별하기 위한 각 대학간의 차별화된 시험이 보완될 터이고, 그렇다면 그 공부까지 보태서 해야 할 우리 아이들이 더더욱 안쓰러워 보일 뿐이다.
오늘 내가 갔던 설명회는 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어 이색적이었다.
학원 원장이라는 사람은 ‘마음 불꽃’이라는 단어를 시작으로 말문을 열었다.
우리 나라 교육 시책은 ‘잘못된 성형 수술’과 같이 끊임없이 고쳐져야 하는 현실에서 사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것 같기는 하다.
내신, 수능, 그 밖의 교내 활동 등을 모두 똑부러지게 열심히 하는 학생이라면, 우수한 성적으로 이어질테고 그렇게 똑똑한 학생들은 입시 결과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좋을 것이다.
많은 학부모들이 전략적인 학원을 찾는 이유는 좀 더 쉽고 편하게 입결을 치루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이 드는 찰나,
'뭐든 본질은 그대로다'라는 의미로 우리 아이들의 마음에 불꽃을 지펴주면 된다고 말하는 이 고지식한 원장의 말에 동감하는 사람은 비단 나뿐이었을까.
이 곳 대치동에서 저런 식상하고 구태 의연한 내용인 설명회가 까다로운 대치맘들에게 먹히지 않을 게 분명한 것을 보여주듯, 왔던 엄마들은 설명회 중간 중간에 한 명 두 명 자리를 비워나가기 시작했다.
역시 발빠르게 바로 해답을 쥐어 줄 수 있는 학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다.
여기 대치동이라는 곳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