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산행기 제94화 청량산 1
우리 옛 선조들은 유난히 유산기(遊山記)를 많이 남겼다고 한다.
그 또한 기록을 중요시하는 우리 조상들의 선비정신이 아닐까 싶다.
조선시대의 유산기는 무려 560편 정도나 된다고 한다.
물론 단연 금강산이 가장 많고 그다음이 지리산과 청량산이다.
그중에 청량산 유산기는 무려 80여 편에 이른다고 하니까 청량산의 명성이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유산기는 요즘의 산행기쯤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근본적으로 다르다.
요즘 우리는 산행(山行)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놀遊(유) 자를 써서 유산(遊山)이라고 했다.
현대인들이 오르는데 중점을 둔 반면에 선조들은 산을 즐기는데 중점을 둔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옛날에는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지만 현대에는 바쁜 일상 때문에 유유자적 1주일씩 산에서 머물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오늘의 청량산 산행기는 유산기로 써보려고 욕심을 내 본다.
그런데 유산을 한 게 아니라 산행을 했기 때문에 역시 산행기가 되고 말았다.
청량산의 등산코스는 크게 6개의 코스로 되어 있다.
그중에 입석에서 출발하는 2코스를 변형해서 정상인 장인봉에 오른 후 다시 입석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택하고 산행을 시작했다.
입석 주차장에서 산길에 들어서자 막 물들기 시작한 싱그러운 연노랑 단풍이 반갑게 맞아준다.
입석에서 시작하는 등산로의 초반은 가볍게 걸을 수 있는 오솔길 수준이었다.
오전 10시 20분.
산행 시작 5분여 만에 갈림길을 만났다.
청량사로 가는 길과 응진전으로 올라가는 삼거리다.
여기에서 나는 응진전 방향을 택했다.
약간의 오르막을 오르자 다시 완만한 산길이 나오고 가늘게 이어지는 응진전으로 가는 산길엔 싱그러운 연두색 가을 나뭇잎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햇빛이 청량한 가을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오솔길 같은 상큼한 아침 산길을 유유자적 10분쯤 오르자 첫 조망점이 나왔다.
첫 조망점에서는 청량산 진입로의 알록달록 물들어가는 단풍길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였다.
그 풍경이 아직 화려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정겨웠다.
그리고 그 위쪽으로는 건너편 축융봉이 올려다보이기 시작했다.
역시 막 물들기 시작한 단풍이 청량했다.
조망점에서 다시 숲길이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하늘이 확 열렸다.
그와 동시에 멋진 암벽이 나타나고 그 아래에 고즈넉한 전각 한 채가 나타났다.
응진전이다.
금탑봉 절벽 중간에 자리 잡고 있는 응진전은 청량사의 부속 건물로 16 나한과 공민왕의 부인인 노국공주의 상이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공민왕이 이곳으로 피난 왔던 인연 때문이란다.
또한 응진전 법당 앞에는 천혜의 조망점이 있다.
그래서 주세봉은 자신의 자를 따서 '경유대'라 불렀다고 한다.
응진전 요사체 옆의 절벽 사이에서는 감로수가 흘러나오고 절벽 위에는 흔들리기는 해도 떨어지니 않는다는 건들바위가 있다고 하는데 볼 수는 없었다.
그 통풍석이라고도 불리는 건들바위에는 응진전의 창건 설화가 얽혀있다.
전해져 오는 설화에 의하면
『옛날 어느 스님이 절터를 찾다가 이곳에 이르렀다.
절터로 손색이 없는 곳이었지만 절벽 위의 위태로운 바위 하나를 치워야 했다.
힘이 센 스님은 그 바위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버렸다.
그런데 다음날 다시 와보니 떨어진 바위가 다시 제자리에 있는 게 아니가?
그래서 스님은 절을 세우지 말라는 부처님의 계시로 알고 절을 짓지 않았다.
하지만 이 바위는 약간만 밀어도 건들건들 거릴 뿐 세게 밀어도 떨어지지는 않았다.
도깨비가 밤중에 가마니를 깔고 끌어다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바위를 '건들바위'라고 불렀다.』
아무튼 가을날 응진전은 아름답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응진전을 지나면서 높아진 고도만큼이나 단풍색도 짙어져가고 있었다.
이윽고 최치원이 거처했던 암자가 있었던 곳을 지나간다.
워낙 터가 좁아서 움막 정도를 짓고 거처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암터 보다도 거창한 안내판보다 누군가 수수하게 기왓장에 적어놓은 안내 글이 더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천혜의 청량사 조망점에 다다랐다.
너무 커서 위압적이지도 않고 너무 작아서 초라해 보이지도 않는 절마당이다.
기암절벽에 에워싸이고 울긋불긋 단풍으로 치장한 절마당이 아름답기도 하고 신비스럽기도 했다.
말 그대로 고즈넉한 산사(山寺)다.
청량사 왼쪽으로는 향로봉(작은 봉우리)과, 연화봉(큰 봉우리)이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다.
다시 조망점 뒤로는 총명 수라는 샘이 있었다.
금탑봉 암벽 아래 있는 이 샘은 장마나 가뭄과 상관없이 똑같은 양의 물이 샘솟는다고 한다.
신라 말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이 물을 마시고 더욱 총명해졌다고 해서 총명수라고 불리게 된 샘이다.
이후 이 소문을 듣고 과거시험을 준비 중인 선비 등 많은 사람들이 이 샘물을 마시기 위해서 찾았다고 한다.
총명수를 지나면 다시 한번 청량사 조망점이 나오고 이어서 어풍대 갈림길이 나왔다.
고대 중국의 '열어구'라는 사람이 바람을 타고 와서 보름 동안 놀다 갔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어풍대는
올라갔다 다시 내려와야 해서 그냥 패스룰 했다.
어풍대 갈림길에서 이제 김생굴을 향해서 오른다.
여기서부터 길은 본격적으로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가파른 목계단을 직진해서 계속 오르면 경일봉, 중간에 좌측으로 오르면 김생굴이다.
나는 경일봉을 패스하고 김생굴로 향했다.
김생굴 가는 길에 만나는 돌덧널무덤이다.
돌덧널무덤은 석곽묘(石槨墓)라고도 하는 돌무덤이다.
삼국시대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이라는데 표지판이 없다면 알 수 없는 모습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망되는 청량사 전경이다.
역시 아름다운 절마당이다.
이윽고 도착한 김생굴이다.
경일봉 암벽 중턱에 있는 김생굴은 신라의 명필 김생이 김생암이라는 암자를 짓고 10여 년간 글씨 공부를 한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김생체는 둥글넓적한 청량산의 산세를 닮았다고 한다.
김생의 글씨에도 한석봉의 이야기와 비슷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설화 내용은 이렇다.
『이곳에서 9년을 공부한 김생이 명필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하산하려 했다.
그때 젊은 여인이 나타나 자신의 길쌈 솜씨와 글씨 솜씨를 겨루어 보자고 했다.
그 여인은 청량봉녀였다.
김생은 그 여인의 제의를 받아들여 굴속에서 불을 끄고 경합을 했다.
그리고 불을 켜고 비교해 보니 여인이 짠 천은 한 올도 흐트러짐이 없었으나 김생의 글씨는 고르지 못했다』
그래서 김생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1년을 더 공부하고 10년 만에 세상으로 나갔다고 한다.
그 김생굴 옆으로는 김생이 붓을 씻었다는 우물이 있다.
그리고 우물 앞에는 김생을 예찬한 퇴계 이황의 시가 걸려 있었다.
다시 김생굴 옆으로는 김생 폭포가 있다.
지금은 건폭포이지만 많은 비가 오면 대단한 수량의 폭포가 된다고 한다.
김생굴 앞에 있는 연리목이다.
둘도 아닌 세 나무가 마치 김생체를 연상케 하는 모습을 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다시 한번 연화봉과 청량사 전경을 감상하고 자소봉을 향해서 간다.
연화봉은 의상봉으로 불리다가 주세붕이 막 피어나는 연꽃 같다고 해서 바꿔 불렀다고 하는 봉우리다.
김생굴을 지나면서부터 자소봉까지는 조망 없는 급경사 구간이다.
그래도 조망은 없지만 오를수록 절정을 향해서 가는 단풍 구경에 힘이 솟았다.
오르는 중간에 만난 특이한 바위다.
무슨 바위일까?
돌을 품고 있는 모양의 독특한 바위다.
산행 시작 후 1시간 50분.
장인봉으로 바로 가는 길과 자소봉으로 오르는 갈림길에 도착했다.
자소봉 8부 능선쯤이다.
그래서 단풍이 제법 짙어졌다.
자소봉은 올라갔다 다시 내려와야 해서 아내는 휴식을 취하고 혼자서 오른다.
여기서 흉측한 상처가 난 소나무를 만났다.
무슨 이단교의 표식 같은 이 상처에는 가슴 아픈 우리 민족의 역사가 있다.
이 상처는 일제 강점기 때 상처다.
그러니까 이 끔찍한 상처를 안고 한 세기를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패색이 짙어가는 일본 군대는 항공유가 부족해서 송진을 정제해서 사용했다.
그때 우리나라 소나무에서 송진을 채취해가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그래서 전국의 오래된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저 흉측한 상처를 안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은 우리나라를 침략하지 않았다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는 정치인이 있다.
그것도 우리나라 최고위층인 '정진석'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이다.
자소봉 오르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그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단풍은 더욱 화사해 졌다.
산에서 이토록 깔끔한 단풍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정상부에서 이렇게 싱그럽고 아름다운 단풍을 보기란 쉽지 않다.
단풍이 절정이라고 산에 오르면 정상부는 대부분 진 상태이기 일쑤다.
아무튼 오늘은 속된 말로 계 탄 날이다.
그렇게 파스텔톤의 참나무 숲을 10분쯤 오르자 마치 하늘을 오를 것 같은 철사다리가 나타났다.
자소봉 정상으로 오르는 사다리다.
이제 자소봉 직벽 계단을 오른다.
워낙 높고 가팔라서 아찔하고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다.
이런 시설이 없던 옛날에 선조들은 어떻게 올랐을까?
더군다나 등산복이나 장비도 없었을 텐데.
그렇게 올라선 자소봉 정상이다.
자소봉은 873.7m로 9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내산 쪽에서는 가장 높은 봉우리다.
그런데도 870m의 장인봉을 청량산의 정상이라 칭한다.
이유는 저 꼭대기를 오를 수 없기 때문이란다.
자소봉은 원래는 보살봉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역시 주세붕이 자소봉으로 고쳐 불렀단다.
자소봉은 우뚝 솟은 암봉이기 때문에 정상으로서 최고의 조망을 선사하고 있었다.
사방팔방이 거칠 것이 없었다.
더군다나 주변의 단풍이 최고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한마디로 만산홍엽이다.
아내도 함께 올라왔더라면 여기에서 점심도 먹고 충분하게 즐기다 내려갈 텐데...
그런 아쉬움을 뒤로하고 바로 하산을 해야 했다.
다시 자소봉 갈림길이다.
이제 하늘다리와 장인봉을 향해서 간다.
계속되는 산행 이야기는 2편 '장인봉'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