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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루나 Apr 24. 2023

#7 서태지와 아이들 <교실 이데아>

근본적인 교육 개혁. 지난하지만 반드시 가야 할 길.

됐어(됐어) 이제 됐어(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족해) 이젠 족해(족해)

내 사투로 내가 늘어놓을래


매일 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리속에

모두 똑같은것만 집어넣고 있어

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그리고 우릴 덥썩 모두를 먹어삼킨

이 시꺼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좀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네 옆에 앉아있는 그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해

좀더 잘난 네가 될수가 있어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날을 헤매일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날을 헤매일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이 노래가 나온 것이 1994년이니 지금은 29년이나 흘렀지만, 대한민국의 입시교육은 지금도 크게 변한 것이 없다는 점이 씁쓸하다. 아니 더 나빠졌다면 나빠졌을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기준으로 경쟁만을 부추기고 개개인의 개성을 억압하는 대한민국 입시 교육을 신랄하게 정면으로 비판한 곡이었기에, 가요톱텐 같은 방송 프로그램 무대에서는 잘 나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거꾸로 틀면 '피가 모자라'는 소리가 들린다며 9시 뉴스에서도 이 노래를 다뤘던 기억이 난다. 이 논란으로 서태지는 사탄 숭배자라는 의혹에 시달려야 했다.


이 노래와 관련된 아주 사적인 에피소드 하나.


나는 그때 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이어서 서태지 세대라고 할 수는 없지만 큰누나가 사다 놓은 테이프를 들을 수 있는 호사를 누렸다. 시간도 많고 놀거리도 많지 않았던 시절 나는 서태지의 매 앨범 전곡을 듣고 또 들었다. 테이프가 늘어지게 들었다. 모든 곡의 가사를 줄줄 외고 학교에서도 부르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교실에서 50명이 넘는 학생들이 선생님 쪽을 바라보고 앉아 그날 시간표대로 정해진 수업을 듣는 교실이라는 공간이 왠지 모르게 답답했던 나는 이 노래가 무척 시원하게 들렸던 것 같다. 까불기 좋아하고 한시도 가만있기 어려운, 지금으로 보면 필경 ADHD로 진단받았을 나는 수업시간에도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는데, 하루는 참다못한 담임 선생님이 나를 교단 앞으로 불러 세웠다. "자리에 앉아서 그러지 말고 여기 앞에 나와서 불러보세요." 아니. 교실에서 교실이데아를 부를 기회가? 나는 흥분했다. 얘들아, 너희들도 이 교실이 답답하지 않니? 우리 함께 이 노래를 떼창하며 이 갑갑한 교실을 뒤집어 버리자. 이 노래를 다른 친구들도 다 알고 있을 거라는 위험한 가정을 했던 나는 내가 '됐어!' 를 외치면 '(됐어!)'라는 메아리가 크게 돌아올 거라 일말의 기대를 품었던 것 같다. 그렇다. 이 노래는 메기고 받는 형식으로 시작된다.


팔을 앞으로 뻗으며 호기롭게 됐어! 라며 노래를 시작하는데 메아리가 돌아오기는커녕 아이들 표정이 마치 외계인을 처음 보듯 난해했다. 그날의 표정들을 잊을 수 없다. 나는 한껏 부풀었던 마음의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며 "됐어 됐어 ... 족해 족해"라며 메기고 받는 걸 혼자서 할 수밖에 없었다. 호기롭게 뻗었던 나의 팔은 갈 곳을 읽으며 점점 굽어 들었고 내 목소리도 점점 기어들어갔다. 나는 본격적인 1절로 들어가지 못한 채 수치심에 눈물을 터트렸고 내 자리로 들어와 엎드려 울었다.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그날 이후로 무대공포증과 목소리떨림증이 생긴 것 같다.


그날의 실패가 미해결 과제로 남았던 것일까. 고1 때 수련회에 가서 각반의 장기자랑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다른 친구 1명을 꼬드겨 우리 반 대표로 나가 이 노래를 기어코 완창했다. 이번엔 비록 노래방 반주지만 MR도 있었고 메기고 받는 형식을 완성할 최소한의 1명의 동료를 확보했다. 몇몇 20대 선생님들이 반색하며 이 노래에 호응해 줬던 게 기억난다. 아마도 그분은 서태지의 팬이었나 보다. 교실에서 교실이데아를 완창하진 못했지만 학교 행사에서 선생님들 앞에서 그 노래를 불렀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날은 스스로의 미션완수(?)에 만족해하며 두 다리 뻗고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잠을 청했던 기억이 난다.


됐어(됐어) 이젠 됐어(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족해)이젠 족해(족해)

내 사투로 내가 늘어놓을래


국민학교에서 중학교로 들어가면

고등학교를 지나 우릴 포장센터로 넘겨

겉보기좋은 널 만들기 위해

우릴 대학이란 포장지로 멋지게 싸버리지

이젠 생각해봐 "대학" 본 얼굴은 가린체 근엄한 척

할 시대가 지나버린건 좀 더 솔직해봐 넌 알수 있어


좀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네 옆에 앉아있는 그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 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


왜 바꾸진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왜 바꾸진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됐어(됐어) 이젠 됐어(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2절은 들을 때마다 그 신랄함에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진 인간이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이란 포장센터로 넘어가는 이미지. 상품으로 전락되어 존엄을 상실하는 인간.


우리나라의 입시 교육이 지향하는 핵심은 간단하다. 모든 문제에는 하나의 정답이 있고 그 정답을 더 빨리 더 정확하게 찾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우월하고 그러지 못하면 열등하다는 것. 100명이 모두 죽어라 열심히 노력해도 어쩔 수 없이 1등과 100등이 나올 수밖에 없는 제로섬 게임. '니 옆에 앉아 있는 그 애보다 더' 잘 나기 위해서는 그 애의 머리를 밟고 올라가야만 한다.


이 우열을 알려주는 지표가 과거엔 등수였지만 현재는 등급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인간에게 등급을 매기는 게 한우에 등급을 매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싶다. 등급 매길 수 있는 것은 상품이고 이용 가능한 자원으로 환원될 뿐이다.

 

어른들이 이런 교육 시스템에서 살아온(혹은 살아남아 온) 아이들에게 '더불어 사는 세상이니 서로 돕고 살라'는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요즘 애들은 너무 개인주의적이고 자기밖에 모른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이건 콩을 심어 놓고 팥을 내놔라 하는 심보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반된 이중메시지를 듣는 학생들은 혼란스럽다. 조현병(정신분열증)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이 이중메시지라는 이론이 있다. 아이들은 경쟁으로 인한 만성적 긴장과 함께 이런 상반된 메시지 속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해야만 한다. 애정을 주고 친해지고 싶은 친구가 경쟁자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양가감정을 견뎌야 한다.


대한민국의 교육 제도는 무수히 수정되어 왔지만, 서열이라는 그 근본은 바꾸지 않으며 매번 또 다른 사교육 시장만을 양산해 왔을 뿐이다. 비유하자면 건물이 흔들리는데 외부 페인트칠과 내부 리모델링만 계속해왔다고 할까. 한 예로 평소의 성실함을 평가한다는 취지하에 수시를 늘리면 내신 대비 전문 학원, 생활기록부 활동을 알차게 채울 수 있는 방법 등을 컨설팅하는 시장이 생겨났다. 서열과 등급이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사교육은 어떻게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그 근본적 교육개혁의 힌트를 얼마 전 중앙대 김누리 교수의 강연을 통해 독일의 사례에서 엿볼 수 있었다. 유대인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잔혹한 일이 일어나게 된 그 근본에는 상대적으로 우등하고 열등한 민족이 있다는 가정이 있었다. 이 가정이 우생학으로 발전되었고, 열등한 존재가 후손을 낳으면 점점 인류 전체가 위협에 빠질 수 있다는 망상으로까지 뻗어갔다. 게르만족이 유대인보다 우월하니, 유대인을 말살하는 것이 인류 전체에 선한 일이라는 영웅주의. 인류의 미래를 위해 인간을 말살하겠다는 결론. 일본이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의 다른 여러 국가들을 대상으로 그토록 잔혹한 짓을 할 수 있었던 근거도 자국민이 다른 아시아인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는 유럽과 동등한 우월한 민족이니 너희들을 근대화시켜 줄 임무가 있다는 논리.


한편 우열을 가정하는 것은 우등한 존재가 열등한 존재보다 더 많은 것들을 누릴 권리가 있음을 부여한다. 입시 지옥에서 사교육의 혜택과 정보력의 도움으로 우월한 위치에 선 선택받은 이들은, 시험이라는 형식 자체는 공정하다고 믿기에 엘리트주의에 빠지가 쉽다. 그러면 나보다 능력이 못한 것들이 내가 열심히 노력한 결과로 누리는 것을 취하는 것이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 이들이 국가에서 대부분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이상 보편적 복지 제도의 확대는 요원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온 나라가 그야말로 폭망하는 뼈저린 경험을 통해 68혁명을 거치며 교육제도부터 근본적으로 바꿨다. 개혁의 핵심은 심플했다. 우열을 가리는 요소들을 없애는 것. 대입 시험을 없애고 대학 서열을 없애고 대학 등록금을 없앴다. 독일 사람들이 모두 자존감이 높고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우리나라처럼 적어도 삶을 제대로 시작해 보기도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들이 나오지 않는다. 각자의 직업에 소명의식을 갖고 만족감을 느끼며 일하는 사람의 비중이 높다.


우리나라 출생률이 낮은 것과 관련해 한 청년을 인터뷰한 내용이 계속 뇌리에 남는다. "이 입시 지옥에 내 아이마저 밀어놓을 용기가 안 나요." 저출산 문제도 질문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아이를 안 낳는지 물으면 안 된다. 왜 아이를 갖는 것이 상상도 못 한 일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물어야 한다. 나는 그 원인이 상당 부분 입시 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줄 세우기 즉 서열화된 대학이 그 주범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도 노랫말처럼 그간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었던 방관자적 입장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자녀가 생기고 사회적 영향력이 커지는 나이대로 접어드는 요즘 아주 작은 변화의 씨앗이라도 심어 나가야겠다는 책임을 느끼는 것 같다. 29년 전 서태지가 그랬듯이. 지금부터 29년 후에라야 찾아올 지난한 변화라 할지라도. 그 길은 여러모로 추구할 가치가 있다. 정답 찾기 능력을 토대로한 줄 세우기 위한 교육, 그런 가르침은 이제 됐고 그걸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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