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트레스 받는 일을 기억에서 지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기억을 지어내 편집한다.
나는 이 방법을 모든 스트레스 받는 일에 기본적으로 적용한다. 그리고 실패하거나 성공한다. 이것은 매우 고난이도의 작업이지만 시각에 따라 멍청해 보이기도 한다. 명백히 일어난 일을 나 혼자서 잊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의 심부름을 가다가 주신 돈 5000원을 고스란히 잃어버렸다. 그 당시 나에게는 매우 큰돈이었다. 물론 혼났다. 그 뒤 새 돈을 받아 심부름을 하고, 방에 틀어박혀 그 일은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작업은 자신마저 속여야 한다. 몇 십분 동안 꼼꼼히 기억을 지워나가고 적당한 새 기억을 만든다. 예를 들면 ‘부모님이 실수로 돈을 안 주셔서 새로 주셨다.’ 라는 기억을 만들어 그것을 나 자신이 믿게 만든다.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지만 꽤 오랜 기간의 연습 덕분에 -여전히 삐걱거리지만- 많이 능숙해졌다.
이것은 매우 위험하고 치사한 방법이다.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 그 잘못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고치려고 하지 않고 회피하기 때문이다. ‘합리화’라는 단어와 비슷하다. 마치 고슴도치가 귀를 단단히 막고 몸을 웅크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떠한 사실을 단기간에 완벽히 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금이 간 대형 수족관의 유리에서 물이 새 나오는 것을 손바닥으로 막아보려는 것과 같다. 나 역시 한 번도 완벽히 잊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이 방법을 계속 사용하고, 완벽히 잊어보려고 애쓰는 이유는 뭘까. 아마 내 자신이 완벽해지고 싶은 욕망이 잘못된 방법으로 표출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이불속에서 끙끙대며 기억을 편집하다 보면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 다름 아닌 또 다른 나다. 걔는 터벅터벅 걸어와서 “어이, 그쯤 해 두고 술이나 마시러 가라고. 휴대폰 좀 봐. 널 부르고 있어.” 하고 말한다.
휴대폰을 보니 정말로 가장 친한 친구들이 술을 마시고 있다. 할일이 없던 나는 자연스럽게 자리에 낀다.
스트레스 해소엔 술만 한 게 없지. 친하고 웃긴 친구들과의 술자리면 더욱 좋고. 소주보다는 맥주가 좋다. 들이키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다들 저마다의 스트레스를 꺼내고 서로의 스트레스를 비웃는다. 그러다 보면 보통 어느새 내 스트레스는 작아져 있다. 아주 가끔은 집채만큼 불어나 있을 때도 있다. 작아지는 스트레스와 커지는 스트레스, 둘의 차이는 뭘까? 고민하기도 전에 다음 잔을 들이킨다. 들이키다 보면 작아지는 스트레스건 커지는 스트레스건 어느 새 기억 저 편에 가있다.
우리는 보통 스트레스를 없애기 위해서는 그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이 없어지거나 그것을 망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술을 마시는 것도, 친구를 만나는 것도, 운동을 하는 것도, 여행을 하는 것은 모두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서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스트레스의 원인은 쉽게 없어지지 않으며, 그것을 영원히 망각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사실 우리는 스트레스를 더 큰 좋은 일로 덮음으로써 스트레스를 견딘다. 스트레스는 ‘좋은 일’이라는 두툼한 이불에 덮힌 채 이불 밑에서 살아있지만 우리는 그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 그것이 해소라면 해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