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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여신 Jul 16. 2023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그 때 그 소녀는 어디로 갔을까

어느 날 과거의 나를 만났다.


  인터넷 서핑 중에 우연히 네이버에서 운영하는 ‘열린연단’이라는 페이지를 발견했다. 각 분야별 저명한 교수님들의 공개 강연이 업로드되어 있는 사이트였다. 몇 번 클릭하며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아주 익숙한 이름들이 눈에 띄었다. 전공 과목에 심취해 열심히 책과 논문을 파고들던 대학생 시절, 책의 저자로 자주 접한 교수들의 이름이었다. 문득 가슴이 벅차올랐다. 잠시 잃어버렸던 과거의 나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그 어린 날 나는 순수했고 열정적이었으며
어리석은 아이였다.


  지금은 글씨 한 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독서와 멀어진지 꽤 됐지만, 한창 때의 나는 1주일에 책 몇 권 쯤은 우습게 읽던 이였다. 리포트 쓰는 일도 세상 재밌었다. 오히려 지금은 잘 읽히지 않는 어려운 책들을 여러 권 쌓아두고 타닥타닥 글을 쓰고 있노라면 마치 컴퓨터 속에 빨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글이 잘 써질 때는 잠을 제쳐두고 새벽녘까지 보고서에 매달렸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내 모습을 참 좋아했다.


그 시절의 나는 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봤고 기울어진 세상에 분노했으며 언젠가 그런 세상을 바꿀 주역이 되겠노라 하는 투지가 있었다.


  혼자서 책 읽는 것 외에 사람들과 의견교환 하는 데에도 흥미가 있었던 나는 학술활동에도 꽤 적극적이었다. 한창 노는 데 관심이 많을 스무 살 무렵부터 학회 활동에 기웃거렸던 나는 달에 두 어번은 책과 논문을 가지고 토론하거나 발표하는 기회를 가졌다. 진로에 대한 고민 때문에 한 게 아니라 순수하게 그 자체가 즐거워서 한 일이었다. 그래서 어떤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땐 어떤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하고 사회현상을 분석하고 나아갈 방향에 대한 제언을 고민하는 일련의 과정이 재미있었다. 비록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은 아니었으나 내 생각의 외연을 넓히는 데 의미있는 활동이었다.



https://www.britannica.com/topic/Lost-American-television-program


  그런 몇 년 간의 진득한 경험이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전문 분야에 대한 논리적 글 전개에 익숙했던 탓에 에세이 쓰는 걸 힘들어 하는 편이다. 그래서 브런치에 글을 쓸 때도 도무지 써지지 않아 답답할 때가 많았다. 구성력이 떨어지고 내용에 알맹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자괴감이 들 때도 있었다. 또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다시 독서 모임을 시작하고 싶어 여러 모임에 기웃거려 봤지만 대부분 '자기계발서'를 주제로 한 책 읽기 모임이 많아 영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난도 높은 논문에 파묻혀 본 경험 때문인지 가벼운 읽을거리에는 도무지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런 모임의 주제는 대개 '상처받지 않고 갓생살기' 같은 것이고 나는 그런 의논거리에는 큰 관심이 없다.


  한편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니 전공서적에 파묻혀 이상적인 결론내기에 집중해 온 지난 세월이 부질없었다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전체적인 경제상황을 분석할 줄은 알았어도 개인적인 경제생활을 어떻게 꾸려나갈 지에 대한 계획은 없었다. 남들이 일찍이 재테크에 눈을 떠 투자에 관심을 가질 때 관련 지식이 전무했던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우적거리기 바빴다. '잘 사는 법'을 배우려 탐독한 철학책은 '부자되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개중에는 책 하나 안 읽고 유투브로 쌓은 지식 덕분에 투자로 대박이 나 이른 나이에 큰 부를 얻게 된 이도 있었다. 한 때 책 속이 길이 있고 답이 있다 생각해 나름대로 열심히 읽고 공부했던 지난 날이 아무런 의미없이 허비한 시간이었다니, 그 허무함이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책과 멀어지게 됐다.


https://www.stealthangelsurvival.com/blogs/news


후회 속에 살던 내가 오랜만에 과거의 나를 마주했다.


  '열린연단' 페이지를 둘러보며 아는 얼굴들을 볼 때마다 과거에 알고 지낸 사람을 만난 것 마냥 반가웠다. 그렇지만 차마 강의를 들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순수했던 과거의 내 모습이 사실 어리석은 것에 불과했다는 생각 때문에 소중하긴커녕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 된 까닭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울컥함이 치밀었다. 지금은 옳다는 데 확신이 없지만 그 때는 분명 옳았다. 좋아해서 했던 공부였다. 진로를 정하고 직업을 갖는 데 아무런 연관이 없었지만 유명한 교수의 강연을 찾아다니고, 학회를 쫓아다니는 게 너무 좋았다. 그런데 그게 내 미래를 위해 정말 잘 한 일이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하다.


그럼에도 반가웠다. 내가 무척 사랑했던 그 시절을 잠시 돌아볼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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