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향해 뛰어드는 삶
떠나기 전엔 미처 몰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여행에 돈 쓰는 게 제일 아까운 사람이었다. '돈은 쓰지 않는 것이다'를 외치며 한 푼이라도 아껴 미래에 써야 한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살았다. 한시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수다스러운 성격 때문에 홀로 떠나는 여행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모름지기 여행이란 함께 좋은 것을 바라보고 맛있는 것을 먹을 지기(知己)가 있어야 한다는 게 신조였다. 그런 어느 날 에어비앤비를 뒤져 숙소를 예약한 건 정말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언제 얼마나 비가 쏟아질지 모를 장마철이었다. 7월 내내 비가 온다는 예보 때문에 여행에 대한 관심이 좀 시들해진 무렵이었다. 웬만한 수국 축제도 막을 내린 터라 꽃구경 하기 좋은 때도 아니었다. 그런데 무작정 바다가 보고 싶었다. 왜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마음 속 답답함이 풀리지 않았다. 며칠 간의 고민이 이어졌다. 유투브 채널 너머의 바다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한 번 풍덩 빠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통장 잔고를 보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런데 속절없이 마음을 빼앗겼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숙소 풍경과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바다 풍경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결제가 완료되어 있었다.
마음 먹고 숙소비를 지른 그 날, 속전속결로 버스표까지 예매를 마쳤다. 숙소와 교통편을 해결하고 나니 순식간에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었다. 며칠 동안 여행을 갈까말까 고민하느라 체한 기분이었는데 이토록 빠르게 체증이 가라앉다니. 그 날 하늘은 하루종일 비를 뿌리고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내 마음 속엔 밝은 태양이 떠 있는 것만 같았다. 갈증을 해갈한 기분이 이런 것이려나. 그 뒤로도 예상치 못한 소비가 늘었다. 캐리어도 사야 했고 여름용 옷도 장만했다. 진작 유행을 타던 아이템이었지만 감히 입을 엄두도 내지 못했던 크롭탑부터 평소엔 시도하지 않았던 과감한 스타일의 옷들을 샀다.
여행 가서 입을 거니깐. 모든 소비는 그렇게 정당화되었다.
예보가 잘 맞지 않아 다행이었다.
출발 하루 전 예보만 해도 여행 가는 삼일 내내 비가 올 것이라 했다. 하지만 예보는 거의 맞지 않았다. 첫 날부터 햇빛이 아주 쨍쨍했다. 처음 집을 나설 때만 해도 회색빛이던 하늘은 시간이 지날수록 푸른빛으로 변했다. 여행지인 속초에 도착했을 때는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맑은 날씨였다. 고온다습한 환경에 금세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긴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여행 1일차의 기분을 만끽하기에 더할나위 없이 좋은 날씨였다. 그저 출근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만 마냥 기분이 즐거웠다. 출발 시간에 맞춰 부지런히 고속터미널역까지 오느라 출근길 북새통에 고생을 좀 했지만 버스에 몸을 싣고 난 뒤부턴 설렘이 가득했다. 함께 터미널을 찾은 여행객들 사이에 나홀로 떠날 채비를 한 채로 앉아 있었지만 그마저도 신났다.
'떠난다' 한 마디에 그저 벅차올랐다.
계획을 하고자 노력하지만 뚜렷한 계획은 또 싫어하는 성격이라 먹을 곳, 가 볼 곳을 찾아보긴 했으나 정작 그대로 실행한 것은 별로 없다. 대충이라도 여기저기 근처를 구경다니다가 맘에 드는 행선지를 발견하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심경이었다. 그래서 나갔다가도 더우면 다시 쉬러 들어왔고 들어왔다가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밖을 나섰다. 그렇게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골목 안쪽에서 발견한 커피숍은 놀라울만큼 향과 맛이 감미로웠고 모두가 줄 서서 먹는다고 해서 가 본 젤라또 집은 그저 그랬다. 유명하다는 만석 닭강정을 사먹고도 썩 만족스럽단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점포를 향하던 길에 발견한 능소화 핀 돌담은 잊을 수가 없다. 남들이 다 간다고 해서 나도 꼭 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굳어진 계기가 됐다.
분명 처음엔 그저 떠난다는 데 의의를 둔 '힐링 여행'이었다. 남들 다 간다는 호캉스 가는 느낌으로 나름 좋은 숙소를 잡아놨었다. 인스타 감성의 사진이 찍힐 것만 같은 감성 숙소에 눈이 뒤집혀 시작한 여행이었다. 물론 사람들의 후기처럼 숙소는 만족스러웠다. 속초해수욕장과 인접한 작은 해안가 근처에 잡아둔 숙소에서 본 일출은 엄청난 장관이었고 모래사장에 사람이 붐비지 않아 혼자 조용히 바다를 즐기기에도 좋았다. 재래시장을 가는 대신 찾았던 인근의 아바이순대국집은 오래된 동네 식당 같은 느낌이었지만 눈이 확 뜨일 만큼 너무 맛있었다. 그저 다른 행선지를 찾아 걷던 길에 발견한 카페는 손님이 없어 혼자 전세 낸 기분으로 커피를 즐기며 이런저런 사진들을 건질 수 있었다. 여행의 묘미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남들 다 가는 코스대로가 아닌 내가 즐길 만한 것들을 찾아 떠나는 것.
여행 그게 뭐라고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맘에 쏙 드는 프로필 사진을 여럿 건지고 끝난 여행은 비록 대단한 볼거리도 없었고 함께할 사람도 없었지만 만족스러웠다. 그럭저럭 맛집들을 잘 찾아냈고 여행지에서만큼은 과감한 패션센스를 선보이며 돌아다녔다. 혼자서 숙박요금을 다 내고 돌아다닌 게 좀 부담스럽긴 했지만 현실에 대한 걱정과 업무에 대한 부담감 없이 자유롭게 쏘다녔던 시간들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물론 계획했던 대로 쉬엄쉬엄 멍 때리는 데에는 실패를 했지만 그게 내 거스를 수 없는 본성이란 걸 자각했다. 호기심에 자극받고 감정에 솔직한 모습. 그게 내가 잊지 말아야 할 내 본모습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로 며칠간은 체력을 소진하고 돌아다닌 탓에 체력은 떨어져 있었는데 부재한 동안 일이 많이 밀려있었다. 다시 원래의 템포를 찾기까지 숨 가쁘게 달려야 해서 좀 힘들었지만 견딜만 했다. 스트레스에서 해방된 그 짧은 3일간 나는 알게 모르게 재충전이 되어 있었으니까. 그래서 말이다. 언제든 힘들고 지칠 때면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적당히 비우고 다시 채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젠 잘 아니까.
또, 떠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