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냄새를 찾아서
이른 새벽, 엄마는 살금살금 일어나 썰렁한 부엌으로 향했다. 꺼져가는 연탄불을 살리고, 낡은 곤로에 석유를 채워 넣었다. 엄마의 아침은 그렇게 연탄아궁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연탄아궁이의 붉은 불씨 위 솥에서 밥이 익어가는 동안, 뭉근한 밥 냄새가 새벽 방 공기를 데웠다. 따뜻해진 방 공기에 더 자고 싶지만, 연이어 문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달걀말이, 김치 볶음, 구수한 찌개 냄새에 부드럽게 눈이 떠졌다. 엄마의 새벽밥 냄새는 단순히 배고픔을 달래주는 것이 아닌, 건강한 하루의 시작을 알려주었고, 따스한 온기 또한 전해주었다.
사계절 우리 집 식탁을 책임지던 가장 강력한 식재료였던 ‘장’은 엄마의 손에서 탄생했다. 해마다 좋은 날을 받아 장을 담그고, 궂은날엔 장독 뚜껑부터 덮고, 볕 좋은 날이면 어김없이 장독 뚜껑을 열어 햇볕에 쬐어주며 잘 익어가게 해주는 그 정성을 닮아서인지 우리 집 장독대와 찌개에는 구수한 냄새가 가득했고, 그 냄새를 먹으며 나는 건강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엄마와 할머니가 해 주시던 밥 냄새는 함께 살아온 우리 가족의 추억이 담긴 냄새였고, 사람이 밥심으로 산다는 말은 영양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품은 밥 냄새도 사람을 힘 나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 엄마는 정말 손맛이 좋으셨는데, 그 손맛이 담긴 장은 외할머니에게서부터 이어진 깊은 맛이었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댁에 가면 겨울이면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을 펴고 누워, 쿰쿰한 청국장 발효 냄새를 맡으며 외할머니의 옛이야기를 듣다 잠들곤 했다. 그 포근한 순간들이 문득 그리워진다. 잘 발효된 장으로 만들어지는 음식의 냄새는 엄마의 시간과 정성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맛있는 향기였다. 신기하게도 어린 시절 가장 먼저 떠오른 냄새는 엄마의 새벽밥 짓는 냄새와 장 냄새, 그리고 시골 할머니 댁 아궁이에서 피어오르던 장작 타는 냄새였다. 군불을 때던 아궁이의 온기와 가마솥 밥이 익어가던 구수한 냄새, 불씨만 남은 아궁이 앞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고구마가 어서 익기를 기다리며 맡던 달콤한 내음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특별한 향기는 내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이토록 선명하고 따뜻한 냄새의 기억들이 남아 있는데, 나의 아이들은 과연 어떤 향기로 과거를 추억하게 될까?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고 인스턴트 음식과 인공적인 향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추억의 향기를 남겨줄 수 있을까? 잊혀 가는 아궁이의 장작 타는 냄새, 가마솥 밥이 익어가는 구수한 냄새, 장독대의 쿰쿰하면서도 깊은 발효 냄새를 내 아이들은 경험하기 어려웠다. 집에서 함께 요리하고 식사하는 시간이 없지는 않지만, 독립하기 전에 더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일상 속의 다채로운 냄새를 통해 아이들과 새로운 추억을 쌓고 싶다. 냄새는 단순한 감각을 넘어,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현재의 감정을 깊이 느끼게 하며, 미래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다.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마들렌을 홍차에 적시는 순간,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강렬하게 되살아나는 장면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처럼 특정한 냄새가 과거의 기억을 강력하게 되살리는 현상을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부르며, 신경과학적으로도 특정 냄새가 뇌의 편도체와 해마를 활성화해 오래된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한다는 증거들이 밝혀지고 있다. 후각은 이토록 강력한 힘으로 우리의 기억과 깊숙이 연결된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쉼 없이 앞만 보고 달려간다. 뭐든지 빨리빨리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탓에, 정작 소중한 가족과의 시간 그리고 잊고 지냈던 추억의 향기 같은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다시 생각해 보면, 냄새는 단순한 감각을 넘어 잊힌 기억을 되살리고, 바쁜 일상에서 잠시나마 삶의 여유를 느끼게 해주는 진정한 풍요로움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쉽고 빠르게 밥을 지을 수 있게 되었고,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될 만큼 편리한 일들이 많아졌음에도, 우리는 그 짧은 기다림조차 견디기 어려워한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학생들은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고, 저녁 식사는 외식이나 배달 음식이 흔한 풍경이 되었다. 압력솥이나 전기밥솥으로는 구수한 누룽지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나는 어릴 적 엄마가 끓여주시던 누룽지 숭늉의 따뜻함과 구수함을 잊을 수 없다. 요즘 솥 밥 식당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 옛날 밥맛과 그 향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편리함만을 좇는 동안, 언제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함께 갓 지은 따뜻한 밥 냄새를 맡으며 식사했는지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잊고 지냈던 소중한 추억과 삶의 여유를 되찾는 뜻밖의 발견을 할 수도 있다.
냄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신기한 추억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다. 기억 속의 냄새를 따라 할머니와 엄마의 정성과 사랑, 그리고 그 시절의 고된 삶까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음식을 입과 눈으로 맛보는 것보다 후각이 얼마나 생생하게 기억을 되살리는지 깨달았다. 아이들이 훗날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며 살아가도록, 내가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향기'라는 사실이 가슴 벅차다. 실제로 “인간은 약 1조 가지 이상의 냄새를 구별할 수 있으며, 이는 시각이나 청각보다 훨씬 뛰어난 감각적 해상도를 보여준다.”는 연구 결과처럼, 이 놀라운 후각 능력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잊지 못할 향기를 만들고, 그 추억을 공유하며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어쩌면 지금, 우리의 삶을 어떤 향기로 채워야 할지 그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따뜻한 밥 냄새처럼, 정겨운 장 냄새처럼, 그리운 장작 타는 냄새처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포근한 '사람 냄새' 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 '사람 냄새'는 나와 가족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채워줄 것이다. 오늘, 우리 삶에 '사람 냄새' 한 조각을 더해보는 건 어떨까요? 어쩌면 잊고 지냈던 따뜻한 기억들이 그 향기를 따라 조용히 피어날지도 모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일상도 '사람 냄새'나는 행복한 매일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