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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웬디 Nov 17. 2024

습관에 대하여

인생의 디폴트 값

습관의 무서움을 안다. 중학생 때 학교 끝나고 오면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기 무서워서 집에 가자마자 티비를 켰다. 그 소리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누군가에게 집에 어린 중학생 말고도 사람이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였고,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를 안심시키려는 시도였다. 혼자 있는 시간을 버티려던 노력은 금세 습관이 되었고 나중에는 누가 있든 없든 그냥 티비를 켰다.


인생의 디폴트 값이 설정된다는 것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것은 내 삶의 기초가 여기에 뿌리내린다는 뜻이었다.


성인이 되어 사회 생활을 하며 작은 자극에도 나는 출렁였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티비부터 켰다. 어떤 실제적 자극도 없는 안전한 동굴로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선택할 수 있는 동굴들이 여럿 있었음에도 내가 굳이 티비를 택했던 것은 그보다 어린 시절 내 삶의 기초를 거기 뿌리내렸던 탓이리라. 돌아보면 일면 덕이기도 지만.


아이를 낳고 키우며 티비에 의존적인 습관만큼은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두 살쯤 되었을 때 말로만 듣던 거실 서재화를 시작했다. 방에 있던 책장을 거실로 가지고 나와 아이 키에 맞게 눕혀주고, 낮은 전면 책장을 구입했다. 아이들이 책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길 바랐고, 내가 의미없이 티비를 켜놓고 있지 않길 바랐다.


아이들에게 티비를 아예 보여주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작은 방에 쇼파와 티비를 넣 디어실 만들었다. 티비를 보고 싶을 때는 다같이 그 방에 들어가서 티비를 봤다.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며 한 때는 티비가 거실로 나오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환경이 복구되자 디폴트 값도 살아났다. 수시로 티비를 켜놓고 자주 앉아서 보고 있는 나에게 놀라 얼른 티비를 방에 구겨 넣었다. 여전히 우리 집 거실엔 티비가 없다.


운전을 처음 배울 적 운전 습관이란 말이 꽂혀 아무 이유 없어도 사이드미러 룸미러를 수시로 봤다. 앞만 보는 습관이 생겨버릴까봐서. 매번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나에게 주는 일종의 미션같은 거였다. 그 결과 나는 미러를 꽤 자주 보는 운전자로 살아가고 있다. 그 과정은 편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게 큰 득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와 내 차를 둘러싼 상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이해는 나와 주변의 안전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습관의 중요성을 알기에 집에서, 학교에서 나는 아이들이 좋은 습관을 들일 수 있도록 여러 시도를 다. 물론 모두가 따라올 순 없다는 것쯤은 안다. 크게 욕심내지 않는다. 효과가 미미할 수도 있고, 사실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제안의 유익을 믿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여름방학 과제를 내주셨다. 종이를 한 장씩 나눠주시고 자를 대고 선생님을 따라 줄을 그리라고 하셨다. 방학 기간 동안의 날짜를 가장 왼쪽에 적고, 그 옆에 국, 영, 수 각 과목의 목표 학습량을 적고, 그 끝에 수행 여부를 O,X로 표시하는 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터디 플래너'였다. 그 과제는 의무가 아니었다. 그래서 검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과제는 내 인생을 바꾸었다. 선생님표 스터디 플래너 덕분에 나는 내 공부를 스스로 계획하고 시간을 조절하고 목표를 달성해가는 과정을 처음 경험해보았다. 처음 겪는 그 과정은 즐거웠고 뿌듯했다. 성적 향상에도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고 기록하는 일상은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여전히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때의 나처럼 누군가 한 사람에게라도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올해도 나는 만나는 아이들에게 아주 작은 좋은 습관을 제안는 중이다. 물 마시기, 9시에 잠자리에 들기, 줄넘기 하기, 신발 정리하기 같은. 사소하지만 중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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