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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 Sep 14. 2020

3.

2020.09.14- 미국 미대 생활 1

내가 다녔던 대학의 4년 중 첫 해는 Foundation Year로 불리는데 본과가 시작되는 2학년 전에 필요한 기초를 쌓는 학년이다. 건축, 사진, 패션 그리고 다른 몇몇의 과는 개별의 파운데이션 학년이 마련되어 있고 나머지 학과생들은 무조건 파운데이션 학년으로 시작한다. 빛과 색의 이론을 배울 수 있는 컬러 수업,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드로잉 수업, 시대별 아트 히스토리 수업, 점, 선, 면, 형을 다루는 3D수업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기본적인 편집 프로그램과 영상을 배우는 디지털 수업으로 1주일의 시간표에 꽉꽉 채워져 있다. 특히나 가장 기본기가 되는 컬러, 드로잉, 3D 수업들은 점심시간을 기점으로 오전 3시간, 오후 3시간으로 나뉘어 하루에 6시간씩 배분하여 듣는다. 모두 같은 커리큘럼을 기본으로 구성되어 있고 교수님 개개인의 수업 스타일, 진행방식과 디테일에는 차이가 있다. 첫 학년은 학교에서 정해주는 데로 짜인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는데 교수님과 본인의 방식이 너무 다르다면 상담을 통해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인터내셔널 학생들이라면 영어 수업이 필수인데 여기서 두 갈래로 나뉜다.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학생들은 학교 측에서 치르는 영어 시험을 보고 정해진 점수를 넘지 못하면 학점 인정이 되지 않는 영어 수업을 들어야 하고 넘는다면 학점 인정이 되는 영어수업을 듣게 된다. 인정이 되지 않게 되면 시간과 돈을 따로 들여서 학점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수업을 또 들어야 다음 학기/ 학년의 수업이수가 가능하다.


새로운 환경을 너무도 바랬던, 그리고 예술고등학교를 3년을 다녔던 2012년의 나는 저 커리큘럼들이 고리타분하게 느껴졌다. 배움에는 끝이 없고 수업의 디테일에나 방식은 더 업그레이드됐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이미 3년을 들어오고 배워 왔던 것을 1년을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답답했다. 그저 빨리 '진짜 미대수업'같은 것을 했으면 좋겠다는 이상한 큰 환상에 그렇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나 이거 이미 다 해봤어'라는 어리석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처음에 특히 정말 귀찮아했던 수업이라면 바로 컬러 수업이었다. 정확한 이름은 LCD (Light, Color and Design).  교수님 스타일 자체도 아이러니하게 무채색 같으셨고 커리큘럼 자체가 자잘하게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이 수업에서 메인으로 쓰이는 도구는 Color Aid라는 건데 색(Hue) 들이 각기 다른 채도와 밝기(Saturations)를 가진 몇백 장의 색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쉽게 말해 쨍한 색부터 칙칙한 색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수업 내용은 교실 창 밖의 풍경을 단색화 한 후 오롯이 빛에 따른 밝고 어둡기만을 가지고 컬러에이드로 오리고 붙여서 그 풍경을 만드는데 마치 내가 모든 것들을 파란색으로만 볼 수 있어서 파란색으로만 풍경의 명암을 표현하는 것이다. 혹은 보색만 이용해서 어느 작품을 재 창조하기도 있었다. 그 작품을 먹지를 이용해 컬러에이드에서 맞는 색들을 찾아서 하나하나 모양대로 잘라야 한다. 아무튼 이건 일부고 학기가 흐를수록 이론이 더 가해져 좀 더 complex한 노동력을 내야 하는 수업이었다.

$50불 정도 하던 컬러에이드. 이 수업 외에는 굳이 쓸 일이 없어서 친구들끼리 사서 반으로 나누기도 한다.  오른쪽사진은 컬러에이드로 만든 색 차트 (이미지 출처-구글)
초반에 배우는 색의 섞임과 투명도에 관한 exercise 진분홍, 연분홍, 노란색의 투명 테이프 위에 연하늘색 투명 테이프를 붙인다고 생각했을 때 겹치는 부분의 색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 학기 중반에 다다르고 있던 어느 날 교수님이 mid term으로 점수를 매길 프로젝트를 내주었다. 시대에 상관없이 하나의 작품을 고르고 그 작품이 어떠한 색과 빛의 이론을 쓰고 있고 작품에 영향을 미쳤는지 준비하고 그것을 컬러에이드를 쓰지 않고서 재해석해오는 것이었다. 컬러에이드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그랬는지 마음이 한결 가볍고 이걸 어떻게 준비할지 생각하니 너무 설렜다. 그렇게 며칠을 보낸 후 생각난 건 Caravaggio의 'Bacchus'와 'Young Sick Bacchus' 였다. 고등학교 마지막 학기 아트 히스토리 시간에 배운 바로 17세기의 이탈리아 화가의 작품이다.

와인의 신 바쿠스를 그린 왼쪽. 병든 바쿠스를 그린 오른쪽, '자화상'이다. (이미지 출처-위키피디아)

그의 일대기나 스타일을 서술하게 되면 역사적 배경 그리고 종교개혁까지 커버해야 하니 서술은 않겠지만, 살인까지 저지른 전과범이 었던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말년을 들여다보면 그가 남긴 그림들과 찰떡같이 맞아떨어진다. 그가 느끼던 혹은 사회가 주던 불안과 광기가 빛의 명암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특히나 이 작품이 떠올랐던 이유는 같은 '바쿠스'를 주제로 두고 명암 외에도 이렇게 다른 느낌으로 표현해 냈다는 게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의 피폐해진 모습을 나타낸 자화상을 현대의 우리들에게 적용한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시작점으로 미드텀을 준비했었다.


화가에 대해서 공부하고 작품에 숨겨진 의미를 파헤치고 역사공부를 하고, 이 프로젝트를 정말 신나게 준비했었다. 이렇게 켜켜이 모든 것들이 엮일 때 비로소 한 작품을 겨우 이해할 수 있을까 말까 한데 앞서 말했던 '진짜 미대수업' 같은 환상에나 빠져서 파운데이션 학년이 재미없다고 느꼈던 나태한 생각을 한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어리석은 자신을 손톱에 때가 낀 바쿠스로 그려낸 카라바조의 모습이 나와 다를게 뭐겠나며 돌아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렇게 이 클래스를 시작으로 마음가짐을 새로이 하고 남은 1학년을 보냈다.


그렇게 2학년 인테리어과를 시작해 졸업을 하고 이제는 매일 빛, 색 그리고 디자인을 논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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